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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라인

리버풀 에세이

by 최동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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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장의 아웃라인.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 선수들의 제 1목표는 바로 그것이다. 경기에 뛰지 않더라도 주급은 나오잖아? 라는 루팡적 사고 방식이 그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그들의 직업이 프리랜서와 흡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 전, 창을 든 건장한 이들은 ‘프리랜서’라는 직업을 명함에 새긴 채, 전쟁이 벌어졌거나 벌어질 것만 같은 나라를 떠돌았다. 그리고 자신의 몸과 창 실력을 드러내며 적당한 몸값을 맞춰줄 영주와 계약을 맺었다. 그들이 계약서에 한 사인은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기 때문에 몸값에 있어서 흥정은 용납치 않았다. 그렇게 계약을 맺은 프리랜서들은 전쟁에 나가 몸값 만큼의 용맹함과 실력을 과시하며 싸움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무서운 것은 전장 안에서의 죽음이 아니었다. 그들이 진정 두려워 한 것은 전장의 선. 그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는 것이었다. 싸움으로 먹고 사는 이들이 싸움터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곧 밥을 먹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떤 명예나 가치도 주어지지 않는 죽음이었다. 말하자면 그 옛날 프리랜서들은 계약서에 사인을 하면서 죽음의 선을 넘는 이들이었지만, 계약조차 하지 못하는 이들은 선 밖에서 쓸쓸히 죽어야 하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다시 축구장으로 돌아가자. 19-20 프리미어리그 개막전으로 말이다.

이번 시즌 프리미어리그 개막전은 작년 리그 2위에 올라선 리버풀과 이번 시즌 승격에 성공한 노리치와의 경기였다. (리버풀 팬들에게는 “위 고 노리치!”라는 외침으로 씁쓸한 추억이 있는 팀인데… 너무 입맛이 쓴 이야기니까 다음에 하도록 하자)


특별한 주전급 선수를 영입하지 않은 리버풀의 개막전 선발은 작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때문에 팀에 늦게 합류한 사디오 마네는 교체 명단으로 시작했다. 경기 전, 몇몇의 의례적인 세레모니가 끝나고 경기장 선을 넘어 선수들이 등장했다. 얼마간의 몸풀기가 끝나자 피치 위에는 11명의 선수만 남고, 나머지 선수들은 벤치를 향해 경기장 밖으로 나가야 했다.


“11 vs 11” 이 공평하고도 신사적인 룰은 인류가 그나마 이성적으로 발전해왔음을 알려주는 지표기도 하다. 죽고 죽이는 전쟁터에서 숫자를 맞추고 시작을 하다니 말이다! 문제는 이런 이성적 발전 덕분에 손해를 보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경기장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는 프리랜서들이다.


그 중에서 가장 경기장을 그리워할 선수는 새로 영입한 골키퍼 아드리안일 것이다. 골키퍼라는 포지션의 특성상 주전 키퍼로 낙점받지 못한 후보 키퍼들은 경기장에 나설 기회가 극히 적다. 그렇기에 신입생 아드리안을 경기장에서 보는 일은 꽤 오래 걸릴 것이라 팬들은 예상했다. 이 예상은 아드리안 본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리그 경기에서 출장하지 못할 것이라는 씁쓸한 예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여기서 꽤나 드문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리버풀의 올 시즌 첫 교체 선수가 바로 골키퍼 아드리안이 된 것이었다. 리버풀의 주전 키퍼이자 이 경기의 선발이었던 알리송은 몇 차례 좋은 선방을 보여준 뒤, 골킥을 차는 과정에서 허벅지에 고통을 느끼고 쓰러져 버렸다. 새로운 등넘버 1번을 새기고 나선 첫 경기에서 만난 불운 중의 불운이었다. 하지만 전쟁터에서 그렇듯 부상의 악령은 믿음이 강한 자든 아닌 자든 상관치 않고 달려드는 법이었다.


이 부상은 알리송과 클롭 감독의 표정을 일그러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후보 키퍼 아드리안의 표정또한 급격히 바뀔 수밖에 없었다. 알리송이 더는 경기를 뛰지 못한다는 판정을 받는 동안 아드리안은 최대한 빨리 몸을 덥혓다. 이미 오를대로 오른 경기장 안의 온도를 맞추기 위해서는 서둘러야 했다. 아드리안이 몸을 푸는 동안 알리송은 부축을 받으며 팬들에게 인사를 하고 경기장의 아웃 라인을 넘어 전장을 빠져나갔다. 역시나 이성적인 축구의 룰은 아웃 라인 안으로 새로운 프리랜서가 들어오길 기다렸고, 아드리안이 리버풀 홈구장 안필드의 골문 앞에서자 주심의 휘슬이 울렸다. 다시 전쟁의 시작이었다.


짧은 휴전은 금새 끝이 나고 공은 빠르게 오갔다. 리버풀은 전반에만 4골을 몰아쳤다. 그리고 전반의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흠뻑 땀을 쏟은 주전 선수들이 하나 둘 락커룸으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뜨거웠던 경기장은 어느 순간 조용해졌다. 경기장의 아웃 라인은 다시금 11명의 프리랜서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리버풀의 선수들에게 여전히 기회는 있었으며 그 자리를 탐하는 프리랜서들의 탐욕이 경기의 승패, 그리고 우승 트로피라는 전리품의 자리를 결정할 것이었다.


19-20 EPL Liverpool v Norwich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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