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끝에서 그녀가 다시 한번 내게 다가왔는데,
그때 카메라의 베터리가 방전되었습니다.
나는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내리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가 내 눈으로 직접 그녀의 시선을 마주한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무경계⟫
미문 | 브라이언 오스틴
1.
여행을 좋아하는 J 덕에 D는 처음으로 여권을 만들었다. 여권을 만드는 데 필요한 첫 단계는 사진찍기였다. 몇 개의 앱을 받아 스스로 찍어보려 하기도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결국 D는 주민등록증을 만든 이후 처음으로 사진관에 갔다. 살짝 미소 지어보라는 사진관 아저씨의 말에 D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데 아저씨의 눈에는 달라진 게 없어 보였는지 두어 번 더 미소를 요구했다. D는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찰칵. 딱히 고를 것도 없었을 테지만 사진관 아저씨는 철두철미한 직업의식으로 사진 셀렉트를 권했다. 여덟 장 정도 찍힌 사진은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그래서 고민할 것도 없었다. D는 그나마 부드러워 보이는 인상의 사진을 골랐고 그 사진은 여권에 새겨졌다.
그 여권으로 다닌 도시가 몇 곳일까. 후쿠오카와 도쿄, 오사카, 이스탄불, 자그레브, 부다페스트, 파리, 리스본... 그리고 발렌시아와 바르셀로나. D의 여권엔 어느새 꽤 많은 도시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도장이 찍힌 곳마다 사진을 찍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가끔 스마트폰 앱이 보여주는 몇 년 전 오늘이라든지, 어디에서의 즐거운 추억이라든지 하는 앨범을 들여다볼 때면 잘 키운 식물 화분을 보는 것처럼 두 사람은 뿌듯해했고, 또 그리워했다.
"거기 사진은 없네?"
하루는 튀르키예 여행 사진을 열었다. 길치인 J와 D에게 작은 아야소피아를 안내해 준 친절한 새댁(왜인지 두 사람은 그 여인을 그렇게 불렀다), 손수레에서 파는 고등어 케밥, 허름한 게스트하우스 옥상에서 먹은 라면 조식, 라면 옆으로 무수히 날아다니는 비둘기와 그 너머로 작게 보이는 보스포루스 해협의 다리. 일정 때문에 먼저 튀르키예에 도착한 J가 홀로 남긴 이국적인 풍경과, 일정을 착각하는 바람에 홀로 하루 더 이스탄불에 머물러야 했던 D가 남긴 감흥 없는 사진들. 그런 사진을 넘겨보던 중 J가 물었던 것이다.
"어디?"
D가 묻자, J는 지명이 잘 생각나지 않는지 두어 글자를 조합하며 중얼거렸다.
"아, 카파도키아?"
J가 생각한 것은 카파도키아였다. 두 사람이 처음 열기구를 탔던 곳. 열기구를 타는 것보다 그것을 타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야 했던 것이 더 힘들었던 곳. 열기구가 올라 돌로 만들어진 협곡 사이를 오가는 장엄한 풍경에 새벽잠이 다 깨어버렸던 곳. 아침에 마시는 와인 한 잔이 얼마나 맛있는지 알게 해준 곳. 두 사람에게 카파도키아는 그런 곳이었다. 당연히 사진이 없을 리 없었다.
"열기구랑 다 있는데?"
D가 말했다.
아니 그거 말고.
"아!"
D는 J가 지금 어떤 곳을 떠올리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곳은 아침의 열기구와는 전혀 다른 곳이자 카파도키아의 두 얼굴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선셋 포인트라 불리는 그곳은 이름 그대로 석양을 볼 수 있는 명소로 일몰 때면 많은 이들이 찾는다.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어 두 사람은 산책할 겸 선셋 포인트에 걸어 올라갔다. 올라가는 중에는 딱히 풍경이랄 것이 없었다. 밝은색의 돌과 바위, 그리고 기암괴석이 보일 뿐이었다. 많은 산이 그렇듯이 말이다.
하지만 선셋 포인트가 있는 장소에 오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곳은 오키나와의 어떤 절벽처럼 만 명이 앉을 만큼 넓지는 않다. 하지만 사랑하는 이의 손을 잡고 걷기에는 충분할 만큼 넓었다. J와 D의 자리도 마련되어 있었다. 아래와 달리 바람이 많이 불어 J는 스카프를 둘렀고, D는 차이를 사러 갔다. 그러는 사이 말을 탄 사람, 노부부, 신혼부부,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온 이들이 그곳에 올랐다. 흥미로운 점은 그들 모두 길을 잃을까 두려운 사람들처럼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D도 테이블에 차이를 올려둔 뒤, J의 손을 잡았다.
그러는 사이, 해는 빠르게 기울었다. 선셋 포인트에는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몰렸다. D는 가장 전망이 좋아 보이는 곳으로 가볼까 싶었지만, J는 여기도 괜찮다 말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선셋 포인트의 몇 걸음 뒤에서 해가 눕는 장면을 마주했다. 그 모습은 뭉크의 그림 속에 나오는 타오르는 듯한 석양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한강 너머로 사라지는 금빛 석양과도 거리가 있었다. D는 이제 막 타기 시작한 숯이나 아궁이에 던져놓은 장작의 불색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이 절경을 보고 고작 떠올리는 것이 숯과 장작이라니... D는 작가가 되기는 글렀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사진이나 찍어두자 싶은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누르지 못한 채, 다시 자리에 앉았다.
"왜? 안 찍어?"
J가 물었다.
"안 담겨."
D가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
J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파도키아의 석양은 두 사람이 가진 카메라로는 담을 수 없었다. 화각이니 렌즈니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리 좋은 카메라로도 담을 수 없는 풍경. 세상엔 그런 것이 아주 많았다. 카파도키아의 석양도 그런 것 중 하나였다. D는 자리에 앉아 금방 식어버린 차이를 마셨다.
2.
그때 마신 차이의 맛이 떠오른 것은 '닻 미술관'에서 열린 브라이언 오스틴의 전시 <무경계>를 보았을 때였다. 브라이언 오스틴은 하와이나 호주의 바다를 오가며 바다의 생명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 사진들은 바다와 땅, 그리고 하늘의 경계를 지우는 작업이었는데, 실제 그가 담은 바다 사진을 보면 모든 것이 이어진 듯 보였다. 아니, 모든 것이 손을 잡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런 그의 전시를 보다 두 사람은 사진이 아닌, 브라이언 오스틴이 남긴 글을 보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하루의 끝에서 그녀가 다시 한번 내게 다가왔는데,
그때 카메라의 베터리가 방전되었습니다.
나는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내리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가 내 눈으로 직접 그녀의 시선을 마주한 처음이자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브라이언 오스틴은 며칠을 바다에 들어가며 고래를 마주했고 그때마다 카메라를 들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을 뷰파인더라는 통해 고래를 보았다. 그러다 카메라 배터리가 방전되어 더는 셔터를 누를 수 없는 순간이 오자 작가는 처음으로 카메라가 아닌 자기 눈으로 고래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순간은 전시장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었다. 그것은 작가와 고래. 오직 두 존재만이 아는 장면이었다. 종류는 달랐지만, 카파도키아의 석양과 브라이언 오스틴이 마주한 고래의 눈빛은 비슷했으리라. 두 사람은 짐작했다. 그렇기에 십 년이 넘은 차이의 향이 아무런 연관도 없는 미술관에서 느껴진 것이리라. 두 사람은 생각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월터라도 된 듯, 시공간을 넘어 같은 장면에 도착했는데, 거기에는 i가 있었다.
3.
감각이 예민해 바다와 느리게 친해진 i. i는 모래에 발을 딛는 것도 싫어했고, 파도 소리에는 귀를 막았다. J와 D는 그런 i와 자주 바다를 향했다. 꼭 바다를 걷지 않더라도, 파도를 즐기지 않더라도 상관없었다. 그저 저토록 커다란 존재도 유해하지 않음을 천천히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바다에 자주 도착했고, 찰나라 할지라도 i에게 바다와 인사를 나눌 수 있게 도왔다. 그렇게 몇 번의 시간이 반복되고, 또 몇 번의 만남이 이어진 어느 날이었다. i는 모래에 발을 디뎠다. 또 걸었다. 뒷걸음질이 아닌 앞으로 조금씩 조금씩. 걸었다. 그 걸음의 앞에는 파도가 있었다. i는 무엇을 보는지 한참을 그대로 선 채, 바다를 바라보았다. D와 J는 그런 i의 모습에 숯의 옅은 불빛. 그 정도의 빛과 온도가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한 번 바라보고 대화 없이 i를 바라보았다.
i는 가끔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이 곁에 있는지 확인하고는 다시 바다에 시선을 두었다. i는 무엇을 보았을까? J와 D도 바다를 바라보았다. 특별한 것 없는 바다. 여전한 모래와 여전한 파도, 또 여전한 수평선. 두 사람의 눈에 비친 바다는 그런 것이었다. 그때, i가 두 사람의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은 i에 가까이, 쪼그려 앉았다. i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는 바다를 향해 손짓했다. 그리고 말했다.
"바다."
그 목소리는 너무나 또렷이 두 사람의 귀에 들어왔다. 파도가 아무리 크게 친다 해도, 때마침 뱃고동 소리가 울린다 해도 i의 목소리만큼 크게 들리진 않았을 것이리라. 두 사람은 생각했다. i가 다시 바다를 보자 J와 D도 아이가 보는 곳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거기엔 바다가 있었다. 어른의 높이에서 볼 때는 지극히 평범했던 바다가. 하지만 i의 높이에서 바라보니 세상을 집어삼킬 것만 같은. 혹은, 온몸으로 세상을 안아줄 것 같은 거대한 바다가. 거기에 있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스마트폰이 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하지만 꺼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미 알고 있었다. 카메라로는 담기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i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없이 눈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리라. 두 사람도 i처럼 바라보았다. 경계 없는 세상. 그곳에 두 발로 선 i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