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리퍼 신고 걸어요
오늘의 목적지인 로그로뇨는 스페인에 있는 행정구역중 '라리오하주의 주도' 이다. 카탈루냐주의 주도인 바르셀로나, 나바다 주의 주도인 팜플로나 같이 행정구역상 주도 라고 일컬어지는곳은 주도인 만큼 인프라가 많이 활성화 되어 있는 대도시인데 로그로뇨는 그런 대도시 들 중 하나 인 곳이다. 팜플로나 이후 4일 만에 대도시에 가는 날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작은 마을이 있는 반면에, 오늘 목적지인 로그로뇨, 그리고 지난번에 들렀던 팜플로나 같은 대도시가 있다.
길을 걷는 순례자들의 성향마다 작은 마을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큰 도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도 한데 나와 아내는 모두 대도시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대도시에는 어김없이 대형 마트가 있었고 대형 마트에서는 아침 점심 저녁을 때울 수 있는 식재료를 아주 값싸게 구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규모가 조금 작은 마을은 마트가 없는 곳도 있고, 있다 하더라도 현지식의 식재료만 판매 했기 때문에 대도시에서 만날 수 있는 대형 마트는 정말이지 천국과도 같은 곳 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날 수 있는 대형 마트는 스페인의 체인점인지 모르겠지만 Dia라는 마트를 볼 수 있었고 우리는 길을 걷다가 Dia가 보이는 마을에 도착하면 기분이 참 좋았다. 순례자들 끼리 모두 'Dia는 사랑이다.' 라는 말을 유행어처럼 읊었었다. 꼭 Dia 한곳 때문은 아니지만 Dia 는 우리가 대도시를 선호하는 가장 큰 이유중 하나였다.
오늘은 생장에서 출발한 지 150Km을 돌파하는 날이고, 우리의 목적지인 로그로뇨는 출발지인 로스아르코스에서 28Km을 걸어야 도착 할 수 있는 곳 이었다. 28km 는 지금껏 걷는 구간 중 가장 긴 거리를 걷는 날이기도 했다.
"여보 오늘은 28Km을 걸어야 하는데 괜찮겠어?"
"응! 괜찮아"
거리개념이 없었던 아내는 28km 가 어느정도인지 감을 잡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다행 스럽게도 어느새 아내는 사타구니가 아프지 않게 되었고, 슬슬 걷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반대로 이시기 쯤 부터 나는 몸무게가 많이 나갔던 탓인지 점점 발바닥과 무릎에 피로가 쌓여 아파오기 시작했다.
로그로뇨로 가는 도중에 BAR에서 크로와상, 커피, 주스까지 세트로 3유로에 파는 간판을 보고 냉큼 들어가 허기를 때웠다. 길을 걷다보니 어느새 배가고파 그랬던건지 아니면 이제는 산티아고 순례길에서의 순례자로써 꽤나 많은 적응이 된 상태였는지 모르겠지만 스페인어를 할 줄도 모르면서 간판을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서 당당하게 한국말로 주문 할 수 있는 짬이 생겨 버린 우리였다.
"올라~! 이거 주세요"
"시"
"그라시아스"
Bar 옆에는 빵집이 하나 있었는데 현지인들이 줄을 길게 서서 있는 모습을 보고 '저긴 분명 맛집 일거야 무조건 먹어야 해'라는 생각에 우리도 현지인과 동기화 되어 줄을서 빵을 구매했다. 코코넛이 들어가 있는 빵과 바게트를 샀는데 왜 사람들이 줄을 서서 사 먹는지 알 것 같은 맛이었다. 평소 빵을 즐겨하지 않았던 아내도 이빵 만큼은 맛있게 먹었다.
Bar에서 구매한 크로와상, 커피, 주스 그리고 빵집에서 구매한 빵까지 먹다가보니 어느정도 배가 차서 빵을 남겼고 남긴 빵은 비닐봉지에 넣어 내 배낭에 메달고 길을 걸었다. Bar에서 일어나 길을 걸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툭' 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빵을 담은 비닐 봉지가 배낭에서 떨어졌고 하필 봉지가 터져서 빵이 모랫길 위에 떨어져 버렸다. 땅바닥에 떨어진 빵을 버릴법도 한데 아내는 얼른 주어서 입으로 '후후' 하고 모래를 털어내고 봉지에도 담지않고 이빵이 너무 맛있어서 버릴수가 없다며 그냥 배낭에 넣었버렸다.
8Km을 더가야 로그로뇨에 도착 하는데 발바닥이 너무 아파서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고 순례길을 걸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준비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신발을 어떤 걸 신고 가는 게 좋을까요?"라는 질문인데 가장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는 게 등산화이다. 하지만 나는 왜 등산화를 추천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자기 발에 맞는 본인이 신었을 때 가장 편한 신발을 준비하는 것이 젤 좋은 것 같다. 걷다 보면 나처럼 슬리퍼를 신고 걷는 사람도 있고, 샌들을 신고 걷는 사람도 있으며 심지어 맨발로 걷는 사람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슬리퍼를 신은 시점부터 계속되는 평지가 나타났다. 몇일 길을 걸으며 패턴 같은게 생겼는데 도착하기 한시간 전은 거리가 길고 안길고를 떠나서 항상 힘들었다. 마지막 한시간이 너무 힘들어 '마의 한시간' 이라고 일컬었는데 오늘도 마의 한시간이 꽤 지루하고 힘들었다.
'마의 한시간' 계속되는 평지, 같은풍경 그 길을 아내와 단둘이 걸었으면 솔직히 서로가 지쳐서 말도 잘 안 하고 묵묵히 길만 걸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최근 며칠 같이 저녁을 먹는 한국인 일행이 있었고 방금 전 휴식을 취했던 bar에서도 한국인 일행을 만나 처음으로 아내와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길을 같이 걸게 되었다. 그분들은 60대의 한국인 부부였고, 우리는 그들을 흰머리 아저씨 부부라고 불렀다.
흰머리 아저씨는 사실 산티아고 순례길에 첫날이었던 피레네에서도 만났었다. 당시에 아저씨는 엄청나게 큰 배낭을 뒤로 메고 또 다른 배낭을 앞으로 메고 배낭 두 개를 짊어지고는 피레네를 성큼성큼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줬었다. 나는 당시 속으로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다. 어떻게 저 나이에 저상태로 걸을 수 있던건지 감탄에 감탄만 했었는데 이날 모든 궁금증이 풀렸다. 나는 흰머리 아저씨와 같이 걷고 아내는 흰머리 아저씨의 아내분과 같이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아저씨 피레네에서 그 모습은 정말 대단했어요"
"히말라야에서는 더했는걸?"
"우와 히말라야도 다녀오셨어요?"
"히말라야뿐만 아니라 전 세계 각지에 안 가본 곳이 없지"
"우와"
"엄홍길 알지? 엄홍길이 내 후배야"
흰머리 아저씨는 가는 내내 젊었을 때의 무용담을 들려줬다. 그리고 그 무용담들이 나는 꽤 재밌게 들렸었다. 나는 나대로 흰머리 아저씨와 같이 걸어갔고 아내는 아내대로 아저씨의 아내분과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며길을 걷게 되었는데 덕분에 지루하기도 하고 힘들기도 했을 마의한시간을 생각보다 수월하게 지나갈 수 있게 되었다.
로그로뇨 알베르게에는 1층 정원에 분수대 같은 곳이 있었다. 많은 순례자들이 그곳에서 발을 담가 발의 열기를 빼는데 샤워를 마친 나는 분수대에 발목을 담그고 따뜻한 햇볕을 맞으며 앉아 있었고 그 시간은 정말 천국과도 같은 기분 이었다. 하루 종일 걸어 내 몸무게를 지탱해주면서 아우성 쳤던 발바닥은 찬물에 들어간 순간 아픔이 없어졌고, 따뜻한 햇살까지 더해지니 노곤 노곤하니 잠이 솔솔 왔다.
스페인에는 정말 부러운 문화가 있는데 '씨에스타'라고 하였다. 햇볕이 너무 강한 오후 2시에서 5시 정도에는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낮잠 시간을 갖게 되는데 이것을 '씨에스타' 라고 했었다. 이 시간에는 마트도 문을 닫고 식당도 문을 닫고 모든 사람들이 오롯이 낮잠을 자면서 체력을 충전한다. 보통 6시~7시에 하루를 시작하는 순례자들은 대부분 20~30Km을 걸으면 1시~2시 정도에 알베르게에 도착하는데 알베르게 도착해서 씻고 나오면 딱 씨에스타 시간과 시간이 겹쳤다.
이 시간에 순례객들은 샤워도 하고 빨래도 하면서 개인 신변 정리를 하는데 나는 항상 '스페인에 왔으니 현지인처럼' 이라는 마인드로 낮잠을 잤다. 어쩌면 금단 현상과 카페인 부족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때 자는 낮잠은 정말 말 그대로 꿀잠이었다. 그러고 보니 에스때야에서 심각하게 담배 얘기를 나눴던 뒤부터는 담배 얘기는 잘 꺼내지 않았다. 아마도 나는 그렇게 담배와의 이별을 받아들이고 있었나 보다.
분수대에 발을 담그고 있을 땐 내 옆에 밸로리와 아만다가 앉았다. 벨로리와 아만다는 순례길 초반부터 만났지만 '부엔 까미노' 라는 인사 외에는 아직까진 서로 말 한마디 니눠보지 않았던 상태였다. 가벼운 눈웃음으로 그저 자신들의 시간을 즐겼지만 나는 외국인과 마주하는 자리가 어색해서 금방 분수대를 떠나 자리를 피해 버렸다. 따뜻한 햇볕을 맞으며 너무 졸려져서 낮잠을 잤다. 30분 정도의 낮잠을 자고 나면 정말 개운해졌는데 아내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내내 한 번도 낮잠을 잔적이 없다. 내가 자는 그 시간 동안 빨래를 하고 빨래를 널고 저녁과 내일을 준비했다. (그렇다고 내가 안 한 건 아니다. 나도 했다)
항상 글을 쓰다보면 후반부에는 먹는 이야기만 쓰게 되는것 같다. 내가 지금 먹는 일기를 쓰는 건지 산티아고 이야기를 쓰는 건지 모르겠다. 걷는 내내 무슨 얘기를 하면서 걸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매일 무엇을 먹었는지는 잘도 기억이 난다. 사실 늘 같은 모습을 보면서 걷기 때문에 특별한 이벤트가 있지 않는 이상은 그저 그날이 그날 같다. 이곳에서는 정말 1차원 적인 고민만 하면 된다. 배고프다, 졸리다, 화장실 가고 싶다. 딱 3가지만 해결되면 몸이 힘든 것 말고는 생각할게 별로 없었다.
흰머리 아저씨 부부와 우리 부부가 같이 장을 봐서 저녁을 해 먹기로 했다. 하루의 일과 중에 가장 기대되는 순간이 바로 저녁식사 시간이다. 오늘의 메뉴는 '닭볶음탕'이다. 여러 명이 같이 저녁을 준비하니 뚝딱뚝딱 금방이다. 그리고 둘이서 먹는 저녁보다 여럿이서 먹는 저녁은 더욱 풍성한 저녁을 만들어줬다. 닭볶음탕을 하고 남은 감자는 삶아서 내일 아침 간식으로 챙겨 뒀다. 조금씩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지혜가 늘어나는 것 같다.
28Km를 걸어야 했던 오늘은 힘들 법도 한데 아내는 참 잘 따라와 주어 하루를 기분 좋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중간에 지칠법한 순간에는 흰머리 아저씨 내외 덕분에 또 그걸 극복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어쨌든 산티아고 순례길은 어떻게던 끝까지 해낼 수 있을 것만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