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층 침대는 아내꺼
이른 아침 5시~6시사이에 일어나 일정을 시작해서 얼리버드라는 별칭을 가졌던 우리가 오늘은 평소보다 한 시간여를 늦게 출발했다. 늦잠을 잔것도 몸이 안좋아서도 아니었다. 오늘은 생장을 출발 한지 100km 지점을 통과하는 날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 을 걷는 순례자들에게 이 100km 지점까지 왔다는 무사히 잘 걸어 온것을 축하해주고 또 앞으로도 힘내라는 의미에서, 이라체라는 마을 길목에서 와인을 무료로 준다는 정보를 입수 했다. 그런데 이 와인이 8시부터 제공 된다고 이야기를 들어 일부러 8시쯤 그곳에 도착하기 위해 평소보다는 늦은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평소 주위가 어두울때 걷기 시작하다가 해가 완전히 뜬 늦은시간에 길을 걸으니 주변의 풍경들이 아침부터 한눈에 다 들어와서 어두울때와는 또다른 느낌을 주었다. 에스떼야를 출발해 아얘기라는 마을을 지나고 나자 이라체 마을이 눈에 보였다. 우리는 보통 저녁에 다음날을 위해서 2리터 정도의 물을 챙겨 배낭에 넣고 길을 걸었다. 하지만 오늘은 1시간 만에 만나는 이라체를 알고 있었기에 빈 물통만 챙겨 길을 걸었다. 잠도 조금 더 잤고 빈 물통덕에 2kg이나가벼워진 배낭을 메고 걸어서 그런지 아침부터 발걸음도 꽤나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이라체에 도착해서 보니 와인은 누군가 직접 나눠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로 치면 약수터 같은 곳에서 본인이 원하는 만큼 따라 마실 수가 있는 곳 이었다. 수도꼭지가 두개 붙어 있는데 한쪽에서는 길을 걸으며 음용 할 수 있는 물이 나왔고 한쪽에서는 와인이 나오는 형식 이었다. 이라체에 도착해서 보니 순례자들은 모두 물 보다는 와인을 따라 마시고 있었다.
우리도 약수터 같은 이곳에서 기념사진을 한컷 찍고 와인을 따라 꼴깍꼴깍 마셨보았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르기 전에 한국에서 인터넷을 통해 이런저런 정보들을 수집하고 영상을 찾아보며 공부할 때 가장 궁금했던 곳 중 하나인 이라체가 내 눈앞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뭔가 흥분됐다. 달콤하고 약간의 쓴맛도 나고 공짜 와인이라 그런건지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맛이 있었다. 평소 아내와 나는 술을 즐겨 마시는 편은 아닌데 왠지 모르게 와인의 매력을 조금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날 이후로 저녁에는 가끔씩 와인을 따로 사서 즐기기도 했다.
우린 조금씩 와인맛만 보고 대신 조그마한 500ml 콜라병에 반병정도 와인을 담아 저녁때 한잔씩 곁들이기로 했다. 배낭에 무게를 늘린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무슨 기분 이었는지 이 와인이라면 1.5L도 담아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조금 있다 무슨 일이 벌어질 줄 모르고 그냥 와인이 나온다는 것이 신기해 물병에 와인을 조금 담아갔을 뿐인데 조금 뒤에 그 와인이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가끔 갈림길이 나온다. 이라체를 지나 조금 걷다보니 오른쪽으로 가면 비포장 도로인 숲 속 길을 걷는 대신에 거리가 조금 더 멀고, 왼쪽으로 가면 잘 포장되어 있는 도로와 인도를 걷지만 거리가 조금 짧은 갈림길 이었다. 비포장 도로인 숲 속 흙길을 걷는 편이 발바닥 이라던지 무릎이 덜 아프지만 거리가 2km 정도 차이가 났었기에 고민이 됐다.
"여보 우리 어느길로 걸을까?"
"글쎄 오빠는 어디로 걷고 싶은데?"
"2km 면 30분 정도 걷는 시간 이니 큰차이는 없는데 고민되네.."
우리가 갈림길 앞에서 어느 코스로 걸을지 고민하고 있는 사이 우리 뒤에서 오던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더 짧은 코스를 선택해서 길을 걸어 나갔다. 길을 걷는 다른사람들을 보며 우리도 그냥 짧은 코스의 아스팔트 길을 걷기로 했다.
그래도 나름 6일째 길을 걸었다고 이제는 익숙해진 것인지 평지도 언덕길도 초반 보다는 잘 걷게 된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역시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또 운이 좋게도 아직까지 나와 아내의 발에는 물집이 잡히지 않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많은 사람들이 오랜시간을 걸어서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물집으로 인한 고통을 안고 길을 걷게 된다.
우리도 한국에서 부터 걱정했던 부분 중에 하나가 물집이었는데 인터넷을 조금 찾아보니 물집이 절대 생기지 않는 양말 이라며 한켤레에 만원 이라는 가격에 양말을 판매해서 속는셈 치고 그 양말을 구매해서 챙겨 왔었다. 그런데 이 양말이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한것 같다. 발가락 양말과 두꺼운 양말을 이중 으로 신는 형태의 양말인데 얄말이 두겹이라 그런지 푹신하고 좋기도 했다.
산티아고는 스페인의 한 지명이기도 하고, 성 야고보의 스페인식 발음이기도 하다. 사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종교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길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내와 나는 둘 모두 종교적인 것엔 아무 뜻이 없는 상태에서 이 길에 나섰다. 그래서 길을 걷다 나오는 종교적인 것들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순례길에 있는 대부분의 마을에는 성당이 하나씩 자리 하고 있었고 우리를 제외한 많은 순례자들은 그날의 일정을 마치고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들어서 인지 모르겠지만 오늘의 목적지인 로스 아르코스에 도착해서는 처음으로 마을에 있는 성당에서 미사를 드려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 다하는 미사 우리도 한번 성당에 들어가 보자 라는 생각에 태어나 처음으로 성당에 들어가 미사라는 것을 드려 보았다.
길에서 마주하는 성당을 보면 들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막상 남의 나라에서 알지도 못하는 건물의 문을 열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날은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들어가게 되었다. 알수 없는 엄숙한 분위기가 있었고, 무언가 평화로워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가 처음인 나는 미사를 끝까지 드리는게 부담스러웠다. 차라리 이시간에 알베르게 에서 누워서 쉬던지 다른 순례자들이랑 이야기나 하면서 놀고 싶은 생각에 그냥 중간에 아내에게 나가자고 했다.
"여보 그냥 나가자"
"왜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냥 뭔가 답답한 기분이 들어"
"그래도 중간에 그냥 나가는 건 실례이지 않을까?
"저기 다른 사람들도 밖에 왔다 갔다 하잖아"
우리가 드렸던 첫 미사는 결국 나의 성화에 10분도 못 넘기고 종료되었다. 예의에 어긋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뭔가 색다른 경험을 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성당의 거대한 규모와 웅장함, 내부의 숙연함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날 이후로 우리는 종종 길을 걷다 마을마다 나오는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곤 했다. 물론 이후로는 중간에 나오진 않았다 지나면 지날수록 익숙함 때문인지 성당 안에서의 시간도 괜찮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사를 마치고 성당에서 나올 때는 항상 우리의 순례길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기도를 드리곤 했다.
로스아르코스 알베르게에서도 역시 저녁은 만들어 먹기로 했다. 이날은 흰쌀밥에 감자 양파볶음이 저녁 메뉴였다. 감자와 양파는 마을에 있는 마트 어딜 가나 구할 수 있었고, 쌀 역시나 저렴한 가격에 구하기 쉬웠다. 또 다른 반찬은 어제도 먹었던 스테이크였다. 스페인은 정말 고기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천국과 같은 곳이었다. 스테이크용 소고기 한 근을 사도 몇천 원 안 되는 돈으로 살 수 있어서 우리는 저녁을 만들어먹는 대부분의 날에 스테이크를 먹었다. 매일 빵과 면만 먹다가 며칠 만에 밥을 지어 먹었더니 이또한 꿀맛 이었다. 역시 한국인은 밥힘 이 있어야 하나보다. 저녁을 다 먹고 앉아있을 때 첫날 생장 알베르게에서 만났던 독일인 친구 리사를 또 만났다.
"리사 안녕? 저녁 먹으려고? 오늘은 어땠어?"
"응 계란 프라이를 해서 저녁을 먹으려고"
"감자 양파볶음 먹어볼래?"
"오 맛있는데? 난 왜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그나저나 리사 내일은 어느 정도 걸어갈 생각이야?
"난 20km 정도 걸어가려고"
"아 정말 우린 28km를 걸어가려고 하는데 이제 그럼 우리 못 만나는 건가?"
"아니야 길을 걷다 보면 우린 또 만날 수 있을 거야"
길을 걸을땐 만날수 없지만 일정이 끝나는 알베르게에서는 계속해서 만나고 있는 리사였다. 리사는 독일어를 쓰는 친구 였기 때문에 정확한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도 서로가 반가워 함에 있어서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오늘까지 6일째 6번 모두 같은 알베르게에서 리사를 만났고 만날때 마다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적당히 묻고 다음날의 목적지에 대해서 물었다. 리사는 또 만날 수 있을 거라 이야기했지만 리사보다 먼 거리를 걷기로 한 우리는 왠지 오늘이 마지막으로 리사를 만나는 날인 것 같았다.
다행히도 아침에 이라체에서 받아둔 와인이 아직 남아 있어 아내와 나 그리고 리사 셋이서 와인을 한잔씩 하며 작별인사 아닌 작별인사를 하게 됐다. 이라체에서 받아 뒀던 와인이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해주는것 같았다. 그리고 이날 이후로 정말 리사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 하는 순간 까지 길에서 다시 만나지는 못했었다. 다행히도 이날 메일 주소를 주고받아 순례길 일정을 마치고 우리가 찍었던 사진을 전달해주며 서로의 까미노를 나중에 추억해 주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다시 헤어지고 다시 만났다가 또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게 계속되는 것 같다.
잠을 자기 전에 아내와 약간의 실갱이가 있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갔던 알베르게는 모두 침대가 2층 침대였는데 처음에는 2층침대를 불편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몇일 알베르게를 이용 하다보니 2층 보다는 1층이 더 좋은 자리 인걸 깨닫게 되었다. 아무 자리나 선택할 수 있다면 둘다 1층 침대에 자리를 잡겠지만 일행 끼리는 1~2층을 배정해주는 경우가 많았기에 아내와 나 둘중 한명은 반드시 2층 침대를 써야 했다.
처음 2층침대를 마주하고는 당연히 남자인 내가 2층에서 잔다고 했었고 별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아내도 그렇게 하라고 했었는데 아내는 내가 화장실을 가거나 하는 이유로 아래로 내려올 때 마다 뭔가가 불안하다 했다. 순례자들이 잠을 자는 숙소인 알베르게, 특히 공립 알베르게는 사실 시설이 그렇게 좋지 않아서 위에서 조금만 움직여도 1층에 있는 침대가 같이 움직여지고 삐걱삐걱 소리가 나곤 했다. (나는 100kg가 넘는다.ㅎㅎ)
그리고 벽 쪽에 붙어 있는 침대가 아닌 가운데 침대를 배정받는 날에는 양 옆이 뚫려 있기 때문에 자면서 많이 움직이는 내가 떨어지면 크게 다칠 것 같다고 어느날 부턴가 아내가 2층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오늘도 아내가 2층으로 올라가겠다는걸 내가 올라간다고 실갱이를 벌였지만, 잠을 자다 떨어져도 상대적으로 가벼운 아내가 무거운 나보다 덜 다칠 것 같다는 생각이 정말 들긴 했기에 못이기는척 아내에게 2층을 양보(?) 했다. 오늘도 그렇게 아내는 나를 위한 배려를 해주었다. 아내는 정말이지 참 고마운 사람이다.
매일 무언가 큰 이벤트는 없지만 소소한 이벤트가 있는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다. 매일 매일 아내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주언지 하루에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책이나 영화 그리고 다큐에서 보았던 것처럼 드라마틱 하지도 않고 코미디도 아니지만 이 길 위에서 주인공은 온전히 우리이고 즐겁게 하루를 보냈다면 이것보다 더큰 행복이 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