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툽에서 '대한민국 표준 29살 여자'라는 동영상을 봤다. 1994년생인 10명의 여성이 참가자로 등장하고, 질문자 앞에는 여러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큰 원이 그려져 있다. 질문자는 참가자들에게 <자신의 외모가 29살 표준 여자라고 생각하면 원 안으로 들어가세요>라고 말한다. 그 후에도 <연애횟수, 학력, 연봉, 자산>에 관한 질문이 뒤따랐다. 참가자들은 각자의 생각에 따라 표준을 설정하고 표준이라 생각하면 원 안으로, 표준 이하 혹은 표준 이상이라고 생각하면 원 밖에 머물렀다. 어떤 참가자는 자신이 표준이라고 생각해 원 안에 들어왔다가도 다른 참가자의 의견을 듣고 스스로가 표준 이하임을 깨달았다고 말하면서 원 밖으로 비로소 물러나기도 했다. 질문과 답이 끝나고 소회를 밝히면서, 몇 참가자들은 '스스로를 표준 이하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는 순간에는 주눅들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아물어 가고 있는 상처에 덮어둔 거즈를 떼어내는듯 쓰라렸다. 지금이야 나는 내가 좋아!라며 외치는 인간이지만 나도 한 때는 표준에 집착했던 때가 있었다.
대학에 들어갔는데 호리호리 날씬한 친구들이 참 많았다. 처음으로 '표준'이라는 단어가 내 삶에 끼어들었다. 내 몸무게가 표준 이상인지 궁금해졌다. 당시에 페북에는(대학생활을 시작했던 2011년에는 페북이 유행이었다. 꺄 노인네...) 여자 미용 몸무게라는 제목의 표가 떠돌아다녔다. 그 표를 표준으로 삼아보니 난 낙제였다. 수업 가기 전에 2시간, 하루 일과를 마치고 2시간. 그렇게 매일 꼬박 4시간씩을 헬스장에서 살았다. 피티도 받지 않는데 트레이너랑 안면을 텄고, 줄넘기를 한 번 잡으면 2,000개씩 했고, (나 굉장히 내외하는 사람이지만) 남자들 틈바구니에 끼어 데드리프트를 하는게 민망하지 않아졌고, 밀가루를 끊고 달걀은 흰자만 먹었다. 몸은 참으로 정직했다. 채 6개월도 안돼서 미용 몸무게가 됐고 요요도 없었다.
참으로 귀신같은 '미용 몸무게'였다. 체중계에 오르면 좋은 점수가 떴다. 전보다 예뻐졌고 무슨 옷을 입어도 잘 맞았다. 원없이 짧은 옷도 입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캠퍼스에서, 강의실에서, 지하철에서 통통한 사람을 보면 그렇게 예뻐 보였다. 그 때는 내 감정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니 이해하기 싫었다. 애써 부풀려 낸 알록달록하게 예쁜 비눗방울이 톡-하고 공중에서 터져서 사라질까봐 무서웠다. 이제는 안다.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마음이 부러웠다. 그때의 나는 나를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다.
공부에 취미를 붙이면서 외모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레 옅어졌다. 운이 좋았다. 키츠, 셸리, 예이츠의 시를 읽고 에세이를 쓰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갔고 헬스장에 갈 시간은 없었다. 매일 아침이면 맨투맨에 청바지를 입고 백팩을 한 쪽 어깨에 휘두르고서 중앙도서관에 갔고, 밤이 깜깜해서야 중도를 나왔다. 확실히 알았다. 지금,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예쁘게 반짝이고 있구나. 청바지가 꽉 맞는지 헐렁해지는지, 그런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큰 결심 없이 시작했던 공부지만, 그 안에서 진짜 나를 처음으로 만났고 나는 석류 상태의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껍질은 투박해서 별달리 예쁘지 않지만 단단하고, 속은 톡 건들면 팡 터질 것처럼 꽉 영글어 있는. 그래서 비로소 확실히 결심했다-나는 공부로 끝장을 봐야겠다. 지금 생각하면 뭣도 모르는게 퍽도 용감했다. 그렇게 영문과를 졸업하고 비법학과라는 딱지를 붙인 채로 로스쿨에 갔고 호되게 혼난 끝에 결국엔 공부로 끝장을 봤다.
굳이 표준을 따져 지금까지의 내 삶을 평가한다면 내게도 표준에 미치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다. 그래도 휘둘리지는 않는다. 나는 지금의 내가 좋으니까. 누군가 내게 표준 운운하면 난 완벽한데-라고는 못해도, 적어도 나로서는 내가 짱이니 너는 니 갈길 가세요-라는 말 정도는 할 줄 아는 사람이 됐다.
그래 솔직해지자. 앞으로의 삶에 대해서는 나도 표준을 떠올린다. 하면 좋다더라-라는 선택지. 선택하기 쉽고 잰체하기 좋지만, 이뤄내려면 내 삶의 많은 달다구리들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그 값을 톡톡히 지불해야 하고 이뤄내고도 진정 내 것이 아니라면 덧없어서 또 다른 표준을 찾아 나서고 만다. 낭비다. 이걸 알면서도 스스로 '몇 년 후에 표준에 미치지 못해도 주눅들지 않을 자신 있어?'라고 묻고 있었다. 주눅든다-는 흐물흐물하고 강단없는 단어는 참 열없다. 찌질한 질문을 던지는 나를 못 본 체 해왔어서 하필 그 영상에서 '주눅들었다'는 표현이 마음 한 가운데 콕 박혔다. 알싸했다. 너 어쩌다 그런 처지가 됐냐-라고 석류였던 내가 툴툴댔다.
내 삶에 표준 따위가 끼어드는 것이 싫다. 표준에는 성공 혹은 실패가 그 뒤에는 오만함 혹은 패배감이 뒤따른다. 나는 오만, 교만, 건방을 지극히 경멸한다. 그 기저에는 표준의 잣대로 이상, 이하를 분류하고 본인은 표준 이상에 속한다는 편협한 생각이 자리잡고 있으니 참 형편없다. 그저 줏대있게 나로 살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까다로운 작은 행복으로 손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가득 채우고 싶다. 그러려면 내가 좋아하는 것이 더 또렷해지고 두터워져야겠지. 아직 늦지 않았다, 아니 아직 이르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사람들을,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고 흡수하고 내 것으로 만들고 내가 그들의 것이 되어야지. 그렇게 내 삶에서 표준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취향을 들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