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시간 내내 바빴다. 며칠 동안 씨름하던 준비서면을 완성해 제출해야 하는 날이어서 손도 마음도 딱딱하게 긴장한 채로 하루가 갔다.
내일이면 남자친구가 이 곳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간다. 여느 곳처럼 그곳도 관사 문제로 잡음이 많았다. 분쟁은 무고한 사람을 부당하게 처우하는 방식으로 해결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모든 분쟁에서 취하는 작지만 까다로운 원칙이다. 희생양이 내가 됐던 남이 되었건 다르지 않다. 그의 관사 사태를 보면서 쉽지 않구나, 또 한 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6시 땡 하자마자 택시를 잡아타고 남자친구를 만나러 갔다. 관사 문제로 워낙 맘고생을 했기에 어찌 달래줘야하나 내심 걱정이 앞섰다. 만나면 내 일 얘기는 입도 뻥긋하지 말고 깔깔 웃어야겠다며 달리는 택시 안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몇 번을 다짐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보니 웬걸 빵긋빵긋 웃으면서 고기를 굽고 있었다. 어찌나 귀엽던지. 그 속을 다 알 길은 없지만 환한 건 언제나 좋으니 깜깜한 얘기는 묻어뒀다.
저녁을 먹는 내내 남자친구 얼굴을 사진처럼 마음에 남겼다. 앞으로는 평일 저녁에 이렇게 밥을 먹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 오늘처럼 퇴근하고 보고 싶으면 어쩌지, 진작에 좀 자주 볼 걸 그랬어. 소용없는 걱정과 후회가 남자친구 얼굴에 덕지덕지 앉았다. 그래도 남자친구는 참 밝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밝은 모습만 보여준다며 툴툴댔었는데 오늘은 그의 항상성이 고마웠다.
그는 내일 볼 것처럼 배웅해달라고 했다. 우리는 내일 볼 수가 없잖아. 나를 속여 내 슬픔을 모르는 척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 방식이 아니야. 그래도 마치 내일 만날 방법이 있는 사이인 양 헤어졌다. 실감이 나지 않았던 덕에.
집으로 돌아와 울컥하길래 한바탕 울고 치웠다. 이럴 때면 내 다정(多情)함과 솔직함이 감당하기 버겁다. 닿는 줄도 몰랐는데 어느새 빨갛게 물들어있는 나를 인정하기 싫어서 못 본 체하다 끝내 거울 앞에 서고 말았다. 타고난 성정이지만 마주할 때마다 낯설다. 이번에는 혼자 서두르는거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까지 더해져 나의 다정함의 꼭지를 잠그고 싶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게 나라는 사람이니 채워진 자리를 듬뿍 사랑하고 빈 자리의 냉기를 견디는 수밖에.
네 밤만 자고 만나기로 했다. 그 날에도 나는 다정하고 솔직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