쭈뼛쭈뼛,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공짜로 얻어먹겠다고 온 것도 아닌데 나는 왜 그들 앞에서 주눅 드는가!
나는 복잡한 이 선택의 순간에 당황하지 않고 여유롭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샌드위치 커스터마이징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
그런 순간들이 있다.
촌스럽고 싶지 않아서 애써 노력하고 있지만 누가 봐도 어색한.
처음 혼자서 지하철을 타게 된 그날, 백팩의 어깨끈을 꼭 부여잡고 주위를 살폈다. 머릿속에서 '코베 가는 서울'과 지하철의 소매치기가 내 가방을 갖고 간다는 흉흉한 이야기들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여기는 서울이야. 조심해야지. 그날따라 거의 사람이 없었던 말끔한 5호선 열차 안에서 서 있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멋쩍어서 앉질 못했다. 도대체 왜 그랬지? 가방을 메고 어리숙하게 서 있는 나에게 아주머니 한분이 "학생, 앉아서 가. 다리 아플 텐데. "라고 말했을 때도 나는 또 어색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하하하." 한참을 그렇게 서서 갔다.
지하철 노선표는 복잡하지만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었다. 역명들과 지하철의 노선번호가 익숙해질 때까지 보고 내가 사는 곳과 내려야 할 곳, 자주 가는 역 근처에서 갈아탈 수 있는 역들까지 둘러보고, 가끔 지상으로 튀어나와 찬란한 한강을 보여주는 잠깐의 시간도 좋았었다. 동대문운동장역(지금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4호선을 갈아타야 하는데 반대로 타면 안 되니까 길음은 안되고, 지하철 노선표를 한참이나 들여다봤었더랬다. 4호선 숙대 입구 역에서 내리면 숙대 정문까지 한~참 걸어 올라가야 한다. 지하철 입구역에 있는 대학치고 가까운 대학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마을버스를 갈아타면 되지만 1분 1초가 아쉬운 아침 수업에는 차라리 뛰어올라가는 게 빠르다. 땀을 흘리고 헉헉 거리면서 강의실에 도착하면 '입구역의 작명'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하고 욕을 했다. 그렇다고 더 일찍 나올 생각은 못했으면서. 아니 안 했으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노련하게 지하철을 갈아타고, 만원 지하철에서도 재빠르게 문 옆 자리를 낚아채는 눈치가 늘어갔다. 더 이상 백팩의 어깨끈을 부여잡지도 않았다. 그러다 고향 친구가 서울에 놀러 왔다. 서울역에서 만난 그 친구는 백팩을 앞으로 메고(심지어!) 나에게 매서운 눈초리로 말했다. "야, 너 가방 열렸다. 조심해." 풉, 아 맞다. 잊고 있었다. "야, 괜찮아. 괜찮아. " 여전히 백팩을 꼭 끌어안고 있는 친구에게 맛있는 걸 사주겠다고 패밀리 레스토랑에 데려갔다.
"친구야, 우리 좀 세련될 필요가 있어!"
앞서 서울의 친구들은 우리 동네엔 없었던 패밀리 레스토랑에 나를 데리고 갔었다. 고기는 미디엄 웰던으로 해주시고요, 에이드는 어쩌고 저쩌고. 소스는 블라블라. 눈이 동그래졌다. "와, 너네 쫌! 멋지다." 폼나게 메뉴를 주문해주는 친구들이 진짜 멋져 보였다. 서른한 개 아이스크림을 능숙하게 골라먹는 것쯤으로는 세련되지 못하는구나 생각했다. 이래서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거구만, 그날의 일기를 그렇게 썼다. 하지만 결국 세련된 서울 사람은 되지 못하고 다시 지방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도 잊고 있었던 주눅 든 순간이 가끔 찾아온다.
오늘의 주눅 든 시간은 샌드위치 커스터마이징과 관련되어있다. 한식, 중식, 양식, 일식, 매운 거, 안 매운 거를 고르다가 아침 식사가 되는 그 식당을 찾았다. 메뉴를 고르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었다. 빵을 고르라고 하는데 그 빵이 그 빵 같다. 구워 드릴까요? 치즈는 어쩌고, 소스는 어쩌고, 야채는 어쩌고, 알바생들의 눈이 나에게로 몰렸다. 고객님을 빤히 쳐다보는 그들의 눈길은 친절하지만 부담스럽다. 밀린 손님이 있는 것도 아닌데 자꾸만 빨리 골라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당황하지만 그래도 아무거나 먹긴 싫어서 말을 꺼냈다.
"저기, 추.... 추천 좀 해주세요. "
"아, 고객님. 렌치 소스를 추천드려요. 아니시면 무난하게 이 소스는 어떠세요? 이 샌드위치에는 이런 소스가 좋고요. 두 개를 섞어도 되시고....."
"아...... 알아서 해주세요. 하하하 "
이래서 으른들이 외식이 힘든겨. 나를 위해 세심하게 배려해 주겠다는데 그 순간만큼은 나를 배려하지 않는 투박한 샌드위치가 그리웠다.
친절한 알바생들의 노력으로 샌드위치를 무사히 사서 나왔다. 맛있다. 감사하다.
세련된 척 애써 노력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차라리 어떻게 하는거냐고 솔직하게 물어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세련되고 싶은 순간들이 더 많아질 것 같은데 그럴 때마다 주눅 들면 안 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