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도 다이어트라는 단어가 필요할까.
나는 항상 통통했다. 굳이 따지자면 뚱뚱과 통통 사이? 날 아주 어린 시절부터 본 친척 어른들은 어쩜 이렇게 살이 많이 빠졌냐고들 하지만 난 여전히 통통하다.
주변에는 키 크고 날씬한 사람들 투성이었고, 어느 무리에서든 난 상위 20%의 통통함이었다. 나의 몸매는 학창 시절 내내 콤플렉스였다. 몸매와 관련된 별명들은 아직도 가슴 깊이 상처로 남아있다. 대학 가면 살 빠진다는 어른들의 말씀은 다 거짓말이었다. 나의 몸매는 꾸준히 유지되었고, 주변 친구들은 거듭되는 다이어트로 말라가기 시작하였다.
주변 친구들은 다이어트를 권유하였지만, 난 한 번도 다이어트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난 표준체중이었고, 건강에 무리가 있는 정도도 아니었다.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나는 꾸준한 운동량을 유지하였고, 먹고 싶은 걸 포기하면서까지 다이어트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힘들게 해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하였다. 친구들은 달라진 몸매를 보면 자존감도 높아지고 세상이 행복해진다고 하는데, 난 표면적인 것에서 오는 만족감보다는 내면적인 단단함을 찾고 싶었다.
주변 친구들이 하나 둘 다이어트를 해서 말라갈 동안 난 꾸준한 내 "표준체중"을 유지하였다. 난 달라진 게 없지만, 또래 친구들의 변화로 상위 20%에서 상위 10%의 통통함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난 여전히 표준체형이었지만, 옷들은 점점 작아져갔고, 프리사이즈는 나와는 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 샐러드 가게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가고, 닭가슴살은 이미 레드오션이 되었다. 회사에서 점심에 샐러드를 배달해 먹는 여자 또래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나의 여자 친구들의 주요 화제는 칼로리, 바디 프로필, 키토 다이어트, 지방흡입과 같은 것들이었고, 난 그 틈에 껴서 할 수 있는 대화가 없었다. 다들 카톡 프로필 사진이 몸매를 드러낸 수영복 사진이나 바디 프로필들로 하나둘씩 바뀌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비록 폭식과 단식을 자유롭게 오가고, 극한의 운동으로 체지방률을 낮추기 위해 힘든 노력을 하였다. 다이어트 기간에는 예민 지수가 높아졌고, 같이 카페를 가도 디저트 얘기는 입밖에도 꺼내지 못하였다. 그들의 피나는 노력 끝에 아이돌 몸매라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특별하지 않았고, 흔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다이어트를 하지 않는 이십 대인 나는 이방인 같은 존재이고, 출렁이는 팔뚝살이나 존재감을 드러내는 뱃살들을 점점 숨기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난 남들의 시선에 의식하지 않고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좋아하자고 되뇌었지만, 거울 속 내 모습에 점점 창피해지기 시작한 것 같다.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인정해주기로 학습하였지만, 눈은 속일 수 없었다. 다이어트 후 몸매는 누가 봐도 예뻐 보였고, 당당함과 아우라는 부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다름은 특별함이 아니었고, 평범해지기 위해서는 다이어트는 필수가 되었다. 나도 평범해지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