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에는 그렇게 갈증이 난다.
종일 말을 해대서 그런 것도 있고, 반강제로 잡다한 일들에 에너지를 쏟아붓고 나니 어딘가 비어버린 느낌이 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루 종일 나를 지탱해주었던 커피는 강력한 이뇨작용을 뽐내며 탈출해버리고, 나는 카페인 찌꺼기와 열 시간 분의 피로가 누적된 몸에 신선한 것을 채우고 싶어 안달이 난다.
그리고 여름이 찐득하게 와서 붙는 요즘,
무얼 마시면 좋을까.
유독 긴 하루였다. 미국과 일하는 외국계 회사라 미국이 아직 일요일인 월요일은 여유로운 반면, 화요일이 되면 주말에 푹 쉬고 온 상사들이 신나서 일을 벌인다. 갈수록 퇴보하는 영어 실력으로 간신히 버텨낸 오늘 같은 날은 퇴근 후에 잠깐이라도 완벽하게 일과 분리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OFF. Detach. 요즘 들어 자주 되뇌는 영단어들이다.
읽어야지 수 십 번을 다짐하고 항상 가방에 처박혀있던 책을 꺼내어 손에 쥔다. 항상 한적해서 조금은 걱정되는 단골 바로 직행해서 흑맥주를 시킨다. [꿀팁] 집 주변에 기네스를 드래프트로 파는 곳을 알아두는 것은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된다. 끝내주는 첫 목넘김에 삶의 의미를 되찾고, 달큼하고 쌉쌀한 끝맛을 느끼며 책장을 펼친다. 폰도 노트북도 가방 안에 넣어두고 책, 흑맥주, 노트와 볼펜만 존재하는 이 완벽한 한 시간 끝에 피로가 녹아간다. 내일도 힘내자.
코로나 때문에 80%의 시간은 재택근무를 하지만 때때로 사무실에 나가서 일을 한다. 협업이나 인프라 면에서 훨씬 더 효율적이긴 하지만, 에어컨을 너무 틀어대어 모두가 긴 가디건을 입고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서 일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면 지구 온난화가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밖에 나가 5분만 서있으면 땀이 주룩주룩 날 텐데 - 이 안은 이글루에 가깝다.
열 시 정도에 퇴근. 야근하는 날은 택시비 지원이 되어 간만에 택시를 탔더니 웬걸, 여기도 움직이는 냉장고다. 기사님께 에어컨을 꺼달라 부탁하고 창문을 내려보지만 집에 도착해서도 내 몸은 으스스한 냉방의 기운이 가득하다. 이럴 땐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나와 선풍기를 틀어놓고 티를 내린다. 밤이니 디카페인 잉글리시 블랙퍼스트 티를 골라 3분 동안 우려내고, 아침에 삶아두고 나간 달걀을 까서 전자렌지에 살짝 덥힌다.
[꿀팁] 나처럼 카페인이 취약하나 밤마다 커피가 땡기는 사람의 집에는 디카페인 커피 캡슐과 아이허브 발 디카페인 홍차가 구비되어있는 편이 좋다.
뜨거운 홍차와 몽실한 계란을 입에 넣고 굴리자 속이 따뜻하게 차오른다. 에어컨으로 꾹꾹 밀어내고 있던 여름을 다시 내 몸 안으로 초대하는 기분이다.
해방의 날이다. TGIF(Thank God it's Friday)!
한 주가 아주 생산적이었냐는 질문에 그렇다, 고 대답할 수 있는 날들은 많지 않지만 금요일에 만큼은 뭔가 내게 마땅히 할당된 기쁨을 누려도 될 것만 같다. 5시 정도에 이른 퇴근을 하고 밖에 나와 후덥지근한 공기를 맞으며 걷는다. 동네 친구에게 문자가 온다. "하이볼 날씨야." 과연 그렇다. 저녁이고 뭐고 일단 청량한 탄산과 위스키의 조합을 맛보아야겠다. 선위스키 후식사.
이런 날은(무슨 날인진 모르겠지만) 돈을 좀 써줘도 된다. 기본 선토리 하이볼도 맛있긴 하지만 내게 주는 상 같은 개념으로 5000원 더 비싼 히비키 위스키로 하이볼을 타 달라 부탁한다. [꿀팁] 나처럼 단맛 나는 음료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하이볼을 주문할 때 토닉 워터가 아닌 탄산수로 하이볼을 타 달라고 꼭 요청하라. 큼지막한 얼음 위로 쏟아지는 황금빛 히비키와 파도처럼 솟아오르는 탄산수를 보고 있자면 적잖이 황홀해진다. 첫 입에 이미 아찔하다. 시원한 가게 안으로 불어오는 뜨거운 저녁 공기를 느끼며 차가운 유리컵을 손에 쥐고 앉아있자니, 한 주를 잘 보냈다 싶다. 퇴근 후의 삶, 마시고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