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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진 Oct 31. 2021

교사의 방향

루소의 '에밀'에서 발견하다.

 일곱 살 남자아이가 세상을 떠났다.

화요일까지 유치원 버스를 타고 등원하여 친구들과 놀던 아이가 수요일에 감기로 결석을 했다.

목요일 아침에는 떨리는 목소리고 아이의 아버지가 유치원으로 전화를 했다. 이제는 영원히 유치원에 올 수 없다고. · · · 금요일은 모든 교직원이 믿어지지 않는 현실에 눈물을 흘렸고 토요일에는 아이의 마지막 가는 길을 찾아 큰 소리로 울었다. 마음속으로 ‘잘 가’라고 백번 천 번을 외쳤다. 아이가 잠든 나무 상자는 너무 좁고 외로워 보였다. 평소에 아이가 입던 옷과 신발을 신고 있었다. 아이의 엄마는 잠든 아들을 보며, “ 잘 가! 다음에도 엄마에게 와! 가서 엄마가 하지 말라고 했던 것 다 하고 재밌게 지내.”라는 인사를 하며 몸을 가누지 못했다. 집으로 운전하며 돌아오는 길에 나는 차 안에서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나의 휴대폰 속에 담긴, 내 아이의 사진보다 훨씬 많은 우리 반 아이들의 사진을 보았다.


 “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나는 어떤 교사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나에게 던졌다. 늘 마음에 넣고 다니는 질문이며 늘 후배 교사들에게 안내하는 질문인데 오늘은 달랐다. 정말 정말 인생에서 가장 무거운 질문이 되었다.      


 나는 그동안 많은 전공과 관련된 수업을 듣고 공부를 하고 현장에서 실천해 왔지만, 올해 다시 보게 된 루소의 ‘에밀’에서 가장 크게 공감하였다.      

 사람들은 전혀 어린이를 알지 못한다. 어린이에 대한 생각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나아가면 갈수록 점점 정도를 벗어나게 된다. 가장 현명하다는 사람들까지도 어린이가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어른들이 알아야 할 것에 대해서만 열중하고 있다. 그들은 언제나 어린이 속에서 어른을 찾고 어른이 되기 전의 어린이의 모습을 생각하지 않는다.     

 루소의 말처럼 여전히 그러하다. 어찌하여 아직도 교육 현장이 이러한가? 다양한 논의가 있을 수 있고 여전히 그렇다는 나의 말이 온전히 개인적인 것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교육과정에서도 학교체계에서도 아이들을 만나고 관찰하는 시간보다 그렇지 않은 시간이 몇십 배는 더 많다는 사실에는 공감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아이들이 아이로서 행복한 시간이 하루 중 얼마가 될 것 같은가? 아이들에게 물어보라! 그것이 학교에 있을 때나, 학원에 있는 시간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 시간이 하루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유치원은 어떠한가? 물론 교육과정은 유아들을 위한 것이며 유아들의 행복한 삶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유아교육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사립유치원은 그러한 국가적인 교육과정을 따르기가 힘들다. 그렇게 유아들을 놀게만 하면 부모들은 그곳에 아이를 보내지 않으니 말이다.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시키면서 아이에게 온갖 종류의 사슬을 채워, 그가 맛보지도 못할 이른바 그 행복이라는 것을 미래에 안겨준다는 미명 아래 아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그런 야만적인 교육을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설령 그 교육이 목적에서는 온당하다고 할지라도 견딜 수 없는 속박에 복종하며 그 각별한 보살핌이 자신에게 꼭 유익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이 마치 죄수처럼 끊임없이 노역에 처해진 불쌍한 아이를 바라보며 어찌 분노가 치밀지 않겠는가?     

 루소가 ‘에밀’을 집필하면서 느꼈던 사회에 대한 분노가 300년 가까이 지난 지금의 나에게도 전해진다. 이런 분노에 찬 말들로 이제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들의 부모에게 외치고 싶다. 자녀는 부모의 인형이 아니며, 그들에게는 자유와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말이다. 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하나의 온전한 인격체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거리를 두고 그들의 삶을 지켜보고 기다리는 시간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이다.     

 지식을 가르치기 전에 그 도구인 내부의 여러 기관을 완성하고 감각훈련에 의해 이성을 준비하는 교육을 나는 소극적 교육이라고 한다. 소극적 교육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교육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미덕을 가르치지 않지만 악덕을 막는다. 또한 진리를 배우게 하지 않지만 잘못을 예방한다.     

 루소는 영유아기 , 소극적인 교육을 말한다. 그것은 적극적인 것의 반대되는 말이 아니다. 내부의 여러 기관을 완성하고 감각 훈련에 의해 이성을 준비하려면 교사의 관찰과 준비는 밖에 있는 것을 학습자에게 가르 치일 보다 훨씬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의 교사들은 그래서  어떤 교육과정 기관보다 알고 있어야 하고 실행해야 하는 것들이 광범위하다. 감각을 훈련하게 하려면   사이에도  발달 속도가 눈에 보이게 다른 영유아들을 끊임없이 관찰해야 하고  관찰 속에서 개별적인 성장 발달에 알맞은 환경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제공만 해서는 안되고  그러한 교육환경 속에서 제공자와 지원자, 놀이자가 되어야 한다. 또한 영유아기 시기에는 눈으로 관찰하고 귀로 듣는 것이 겉으로 보이는  이상의 것들이  이면에 존재한다.  넘어의 것까지 연령별 발달에 따라  알고 있어야 그들과 소통할  있고, 자유롭고 즐거운 교육 공간을 제공할  있다.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약속하는 아이는 약속을 할 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자기 약속을 어길 때는 다르다. 그것은 소급력이 있는 일종의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그 약속을 했던 것을 아주 잘 기억하고 있지만 약속을 지켜야 하는 중요성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를 알지 못하는 그는 상황의 결과를 예측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약속을 어길 때, 그 나이에 맞는 이성에 어긋나는 행동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예를 들어 루소가 말한 이 부분은 영유아들의 도덕교육에 적용될 수 있는데, 좋아하는 친구에게 자신이 소중히 생각하는 물건을 주었다가, 다름 날 다시 그 물건은 내 것이니 다시 달라고 말한다. 교사가 그 아이의 도덕 발달 수준을 모른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네가 준 것이니, 받은 친구는 잘못이 없어. 친구에게 준 것을 다시 네 것이라고 달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야.”     

 그러나 루소가 말한 것처럼 그 나이에 맞는 이성을 갖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교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OO이가 이 물건이 다시 갖고 싶구나! 그렇지? 그런데 △△이는 이것을 너에 선물 받은 것이라고 다시 주고 싶지 않은가 봐! **에게 뭐라고 말해주면 좋을까?”     

“△△아! OO이가 다시 그 물건이 갖고 싶은가 봐! 네가 좋아서 그것을 주었지만 오늘은 다시 갖고 싶은 생각이 들었나 봐 우리 OO에게 뭐라고 말해주면 좋을까?”     

 이런 짧은 대화만 시도하여도 영유아들은 그 행동에 대한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다. 그 정도의 타인 조망수용능력이 아직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호작용 과정이 이 영유들의 감정조절 능력을 기르게 하고 이것이 도덕 발달에 시작이 되는 것이다.     

 자연은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아이이기를 원한다.
이 질서를 거역하면 우리는 익지도 않아 맛도 없는, 이내 썩어버릴 과일을 산출하게 될 것이다.     

아! 이 말은 정말 영유아 교육의 핵심이다. ‘아이다움’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왜 이리도 힘든 것인가?

왜 이렇게 성인의 시야에서 그들이 지나 온 경험을 전제로 가르치려고 하는가?   

 진실로 영유아를 가르친다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꺼낼 수 있도록 기다리고, 관찰하고, 지원하는 것이다. 루소는 그것을 소극적 교육이라고 말하고 그것에 나는 찬성하며 그것은 가장 유아교육을 적극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리 반 아이들의 사진을 보며 울면서 다짐했다.

‘선생님이 더 많이 안아주고, 더 많이 기다려 주고, 더 많은 것을 발견할게. 너희들의 즐겁고 행복한 순간들이 많은 시간의 지점으로 남을 수 있도록 할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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