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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냠냐미 Mar 23. 2024

08. 나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 BALI

걱정 없는 2주간 자유의 기록

UPP 최종합격하고 며칠 뒤 바로 발리로 떠났다.

사실 UPP 최종합격 일정을 보고 잡았던 여행으로, 불합격하면 미국 비자에 집중해야겠다는 마음이었다.



여행일정은 2주였으며, 장기여행은 2019-2020년 유럽 이후로 오랜만이었다.

여행에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3개였다. 

① 그동안 마음고생 했던 거 다 잊고, 새출발을 위해 마음을 비우고 오기

② 대략 2년 정도 소요될 여정을 위한 연료 충전하기

③ 넓고 다양한 환경에서 새로움에 겁 없이 마주하고 오기


상당히 추상적인 내용이지만, 끝없이 고민하고 걱정만 하던 나에게 중요한 목표였다.

이런 시간을 주는 것 자체로 울진 가기 전, 어쩌면 조종사로서 새롭게 취직하기 전 마지막 자유의 선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난 악착같이 해야만 하니까^__^


아무튼 2주 간의 발리 기록을 남겨볼까 한다. 

여행 기록이라기보다 하루하루 내가 느꼈던 주요 감정들을 정리할 것이다.

반복되는 자기 성찰 및 다짐의 연속이지만, 분명 미래의 나에게 좋은 거름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DAY 1 : 좋게 생각하면 좋은 것이지

베트남을 경유해서 발리로 가는 비행기표를 예매했는데, 인천 출발편이 2시간가량 지연되면서 호찌민> 발리 연결항공편을 놓쳐버렸다 ㅎㅎ 평소 같으면 걱정부터 했을 텐데 마음을 비우고 긍정적으로 모든 걸 받아들여보고자 노력했더니 그 상황이 싫지만은 않았다.

침착하게 예약해 뒀던 공항픽업, 숙소 등에 취소 요청 연락을 취했고, 항공사 카운터에 가서 관련 조치를 확인했다. 여행이 잘 풀리려고 하는 것인지 항공사에서 호찌민에 호텔을 제공해 줬고, 저녁/아침/공항셔틀까지 마련해 줬다. 덕분에 발리만 여행할 것을 호찌민도 1일 여행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친구랑 즐겁고 알찬 호찌민에서의 1일을 보냈다.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달았던 순간이었다.


DAY 2 : 일희(一喜) 하는 삶을 살자

새벽같이 호찌민에서 발리행 비행기를 탔고, 발리에 도착하니 점심이 지나있었다.

공항픽업 차량 기사님은 어찌나 친절하시고, 날씨는 왜 이렇게 좋은 것인지! 시작이 좋았다. 숙소도 아기자기하고 귀엽고, 숙소 스태프도 너무 친절했다. 소소한 하나하나가 모이니 본격적으로 여행 시작하지도 않은 발리와 사랑에 빠진 기분이었다. 

문득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지만, 일희(一喜)하는 것은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 심리를 긍정적으로 바꾸어주고, 그것은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까지 바꾸어주니까! 생각해 보면 나는 일비(一悲)하는 경향이 종종 있는데, 이날도 흥정 실패 후 구매하고서 다른 가게 가격 본 뒤 잠시 나의 섣부름을 탓하며 일비할 뻔했다. 이런 습관은 버리는 남은 12일이 되자고 다짐했다.


DAY 3 : 힐링템 있다는 것은 행운

우붓에서 꾸따로 넘어왔다. 스페인을 기점으로 '바다 좋아' 인간이 되었는데, 해변을 보자마자 급격히 설레기 시작했다. 선베드 잡고 바다에 뛰어 들어갔는데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나는 '물속성'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문득 힘들거나 지칠 때 바다가 많이 생각났는데, 그렇다면 바다가 곧 내 힐링템이 아닌가 싶었다. 힐링템답게 바다를 가까이하면 근심걱정이 사라지는 기분이다. 신나기도 하고 차분해지기도 하며 마음이 정리되기도 한다. 꾸따에서 마주한 바다가 딱 나에게 그랬다.

좋아하는 바다에서 마주한 행복한 사람들과의 대화는 마음을 더 들뜨게 했다. 우리가 모래 하트샷 찍으려고 파놓은 구멍 보시고 본인도 찍어도 되는지 물어본 외국인 아줌마, 옆에서 갑자기 우리랑 같이 단체사진 찍은 외국인들과의 짧은 만남은 바다가 더 좋아지게 했다. 남은 기간 동안 질리도록 바다랑 붙어있어야지!


DAY 4 : 잘못에 대한 당당함  

누사페니다 일일투어를 가서 그림 같은 바다에서 예쁜 물고기들이랑 수영도 하고, 섬투어도 했다. 이날 자연을 보며 느낀 경이로움과 감동도 분명 있었지만, 기억에 남는 다른 일이 있었다.

꾸따에서 항구까지 가는 픽업차량을 같이 탄 중국인 친구가 있었다. 그냥 가볍게 얘기하며 배도 같이 타고, 돌아오는 배에서도 만나 같은 차량으로 꾸따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차량에서 친구가 우리랑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Chinese version 루피라며.. 우리 잔망루피 카피버전을 보여줬다. 오.. 뭐 그럴 수 있지 하하하고 넘겼다가, Kdrama 이야기가 나오고, 다소 당당하게 불법사이트에서 '더글로리'를 보았음을 말해서 당황했다. 중국의 불법사이트는 국내에서 자주 이슈가 되는 만큼 콘텐츠 불법복제에 대한 경각심이 강해있던 나는 그 친구의 잘못에 대한 무지에 놀랄 뿐이었다. 분명 잘못된 것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당당한 이유는 무엇일까를 고민해 보게 되었다. 잘못에 당당하면.. 그건 잘못을 고칠 의지가 없다는 것인데.. 중국 불법사이트의 문제는 절대 해결되지 않겠구나 싶었다.


DAY5 : 열심히 사는 삶의 아름다움

오래간만에 여유롭게 일어나서 수영하고, 씻고 나간 날이었다. 식당 창가에 앉아서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데, 창밖으로 분리수거하시는 현지인 아저씨가 보였다. 사람들이 쓰레기통에 이것저것 다 버린 것을 분리수거해서 가져 가시는 것이었다(이제 직업인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추후 다른 도시에서 쓰레기통 내 쓰레기를 분리수거해 가는 분들을 종종 보았다). 그분은 다리가 불편하신지 다리를 절었는데, 본인 몸통 만한 분리수거 자루를 들고 다니시며 분리수거를 하시는 모습이 뭔가 감동적이고 나를 돌아보게 했다. 이런저런 나라를 여행하다 보면서 사연이 있든 없든 열심히 일할 생각은 안 하고 소매치기를 하는 사람들도 보았다. 이런 사람들과 달리 그분을 보며 분명 다른 사람들보다 열악한 조건을 가지고 계셨음에도 웃는 얼굴로 궂은일을 하시고 계시는 모습, 그 열심히 사는 모습이 아름다웠던 것 같다. 동시에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처한 현실에 불만을 갖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나태해지는 것은 아닌지, 난 웃으면서 내 할 일을 해내고 있는지. 그런 고민! 이건 분명 동정심과 다른 기분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찰나에 존경심을 느꼈던 것 같다. 주어진 환경이 어떻든, 내가 어떻든 삶을 열심히 사는 모습은 아름다웠고, 나도 그렇게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겠노라고 다짐하며 점심을 먹었던 하루였다.


DAY6 : 목표를 향해 열심히 파닥거리자 

꾸따에 새끼 거북이를 방생하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해서 소정의 기부금과 함께 참여했다. 여기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은 거북이의 알은 온도에 따라 성별이 정해진다고 하는데, 기온이 따뜻해지면서 암컷 거북이 부화율이 높아져 성비에 불균형이 왔다고 했다. 개체수가 보존되기 위해서 성비가 맞춰져야 하기에 거북이 알을 온도별로 관리하여 부화된 새끼들을 보호하고, 바다거북의 개체를 보호한다고 했다. 부화된 거북이들이 자연에 나갈 수 있도록 방생하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주요 내용이었다. 지구 온난화로 인간의 도움을 받아야 개체가 보존될 수 있는 바다거북의 운명이 안타까웠으며, 인간 탓이니 인간이 책임져야 함을 다시금 깨달았다.

거북이를 한 마리씩 통에 담아 해변에 동시에 방생하기 위해 모래 위에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너무 신기했던 것은 통에 있는 거북이가 얌전히 있다가 바다를 보자 바다를 향해 열심히 헤엄쳤다. 통을 탈출할까 봐 통 방향을 돌리면 어떻게 알고 다시 바다를 바라보며 헤엄쳤다. 이게 바다로 돌아가고자 하는 새끼거북의 본능이자 목표의식이구나를 느꼈다. 모래 위에 방생한 새끼거북이들은 그 작고 소중한 4개의 지느러미로 열심히 바다를 향해 기어갔다. 나에게는 다섯 걸음가량 될 거리가 그들에게는 얼마나 천리 같았을까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한번 격렬하게 네 개의 지느러미를 파닥거려봤자 찔끔 움직이는데, 포기하지 않고 바다만을 바라보며 열심히 파닥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거북이를 보며 내가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열심히 발악했다고 생각했는데도 결과가 미미하면 정말 낙담하고 자존감이 떨어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런 태도는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방해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목표는 절대 하루아침에 단번에 얻어지지 않음을 명심하고 목표를 바라보며 꾸준히 노력해야 함을 되새겼다. 아무래도 작은 움직임이지만 바다라는 목표에 다가갔다는 이유로 포기하지 않고 더 열심히 파닥거리는 새끼거북가 되어야겠다.



DAY7 : 생각의 전환! 행불행은 선택

여행할 때 단 한 번도 지갑을 비롯해 물건을 잃어버린 적 없던 내가, 지갑을 잃어버렸다. 짱구로 숙소를 옮겼는데 꾸따 호텔 로비에서 택시를 기다리며 지갑에서 카드를 잠시 꺼내고 지갑을 호텔 로비 소파에 그대로 두고 온 것이다. 웃긴 건 난 짱구에 도착해서 체크인할 때까지 몰랐다가, 꾸따 호텔에서 보내온 분실물 메일을 보고 깨달았다. 꾸따에서 짱구까지 차로 1시간 정도 걸렸기에 잠시 뇌정지가 왔다. 짱구에서의 시간을 날려야 하는데, 아까운 생각이 잔뜩 들었다. 

그러다 고젝(오토바이 택시)이라는 선택지를 떠올렸다. 발리 와서 어차피 고젝 한 번 타보려고 했고, 택시로 이동하면서 발리 골목골목을 다녀보지 못했으니 고젝을 탈 이유는 충분했다. 이뿐만 아니라, 택시보다 이동할 수 있는 도로가 많아서 시간도 단축되었다. 고젝을 타기로 결정하고서 고젝을 타고 꾸따로 향했다. 처음 타는 오토바이라 무서웠지만, 논밭 사이를 달리고, 예쁜 집들이 있는 골목으로 이동하면서 일주일 동안 보지 못했던 발리의 풍경을 볼 수 있었고, 선선하게 부는 바람과 서서히 지는 노을 덕에 낭만 한 스푼이 추가되어 어쩌면 지갑을 두고 온 게 신의 한 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꾸따에 도착하니 4박 했다고 꾸따가 친근한 동네로 느껴졌다. 지갑은 다행히 호텔 로비에 두고 온 것이라 비교적 안전했고, 없어진 내용물도 없었다. 지갑을 찾아 다시 고젝을 타고 짱구로 돌아가는데 해가져서 점차 어두워지는 하늘을 실시간으로 만끽할 수 있었다. 더하여, 기사님의 양해와 함께 오토바이 주유 현장에도 함께 갔는데, 내가 언제 발리 주유소를 와보겠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갑을 두고 온 암담한 상황에서 이 상황을 이용하여 내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더니 2주 발리 여행 중에 잊을 수 없는 낭만 가득한 하루가 되었다. 여행의 단편적인 사건 하나지만, 인생을 살아가면서 좌절할 상황이 오더라도 그것에 매몰되지 말고, 그것으로 인해 발생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며,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따라 삶의 한 페이지가 달라지겠구나를 몸소 배웠던 하루다.


DAY8 : 편안한 마음 갖는 연습

발리에 오면 꼭 하고 싶었던 것 중 하나가 요가였는데, 마침 숙소에 요가클래스가 있어서 신청했다. 요가클래스에는 연령도, 성별도 다양했다. 처음에는 곧잘 따라 하겠더니, 자세 난도가 올라갈수록 실패하는 동작들이 몇 가지 나왔다. 요가 강사님은 모든 생각을 비우고 몸에 집중하라고 하며, 무리하지 말고 몸이 허락하는 정도까지만 동작을 하라고 했다. 하지만 동작을 잘 해내고 싶은 마음에 눈을 감고 요가 강사님의 목소리를 따라 동작을 해야 하는 구간에서 실눈을 뜨고 강사님을 보고, 수시로 주변 사람들을 보며 따라 하고 있는 나를 봤다. 내가 열등생이 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했던 것 같다.

처음에 요가를 하고 싶었던 이유는 1) 발리는 요가가 유명하다/ 2) 요가로 스트레칭하고 싶다/ 3) 요가하면서라도 마음의 평화를 찾고 싶다 이 세 가지 이유였다. 하지만 나는 3번째 이유인 마음의 평화를 찾기는커녕 이것조차 잘 해내고 싶어서 아등바등하는 것이었다. 상당히 아이러니한 거 아니냐고ㅎ.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자신의 몸 상태를 깨닫고 타협하여 동작을 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고, 그들의 표정은 편안했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어서 현재 내 상태를 받아들이는 연습을 했다. 요가 막바지가 되어서야 생각을 비우고 오롯이 내 몸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요가 클래스에서 딱 한 번 편안한 마음 갖기 연습을 했지만, 적어도 남은 여행 기간 동안에는 이 연습을 지속적으로 해보려고 한다. 생각을 비우고 하고 있는 것에 몰입하기, 생각부자 고민부자인 나에게 어렵겠지만 습관화해 보자! 


DAY9 : 옥수수가 남긴 따뜻함

이날도 어김없이 바닷가를 누비며 바다를 만끽하고, 노을을 바라보며 감성에 젖은 파워 F모드였다. 해가 바다 뒤로 넘어가고 숙소로 가기 전에 옥수수구이를 하나 먹고 들어가자 싶어서 옥수수구이를 사 먹었다. 아저씨가 상당히 친절하셨고 매운 거 좋아한다고 하니까 맛조합도 추천해 주셨다. 그렇게 옥수수를 들고 어둑한 바다를 앞으로 반짝반짝 조명이 바삐 움직이는 비치클럽을 뒤로하고 다시 그 분위기에 녹아들었다. 감성에 젖은 채로 옥수수를 열심히 뜯어먹던 중 옥수숫대가 부러져 반도 못 먹은 옥수수가 모래에 뒹굴어버렸다. 요 며칠 동안 실천한 긍정적인 생각, 생각의 전환 등을 시전 하며 다 먹었으면 배가 너무 불렀을 것이며, 맛을 보았으니 되었다!라고 바다 구경 더 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떨어진 옥수수를 주워서 어디에 버리지 고민하면서 걷던 중 옥수수 매대를 지나쳤고 아저씨가 쓰레기 여기에 버리라고 불러주셨다. 쓰레기통을 선뜻 내어주시는 것으로도 그의 친절함에 고마웠다. 버리면서 나 이거 먹다가 떨어뜨려서 다 못 먹었다고 웃으면서 말했는데, 아저씨가 갑자기 새 거 하나 주시겠다고 했다. 오... 이건 전혀 의도가 없었던 전개였는데!! 내가 먹은 소스 조합까지 기억하셔서 그대로 주셨다. 진짜 그냥 주시는 거냐고 물어보니까, 선물이라며 그냥 주셨다. 아저씨의 작은 인심과 친절함에 기분이 좋아졌다. 하루종일 많이 걷고, 맛있는 것도 먹고 바다도 원 없이 구경했음에도 하루의 소감을 결정한 것 이 아저씨의 베풂이었다. 나도 친절함으로 누군가의 하루가 기분 좋게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DAY10 : 마음의 여유에서 비롯된 태도

길리로 이동하는 날이라 아침 일찍부터 항구로 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보트에 탑승하여 보트 루프탑에 앉아서 햇빛을 온몸으로 즐기면서 1시간 40분 정도 시간을 보냈다. 탑승 후, 선원이 위로 샤워하듯이 파도가 많이 튈 거라고 했는데, 가는 동안 샤워할 정도는 아니어서 괜찮네! 하면서 낮잠도 잤다. 그런데 웬걸, 길리섬으로 다가갈수록 파도가 높아지는 것이었다. 내가 또 선미 방향에 앉았더니 높이 치는 파도를 그대로 다 받아냈다! 안경은 닦는 것이 의미가 없어지고 짐가방도 옷도 다 젖어버린 것이다...!

평소였다면 찝찝함에 몸서리를 쳤을 나지만, 왠지 모르게 이조차도 너무 재미있고 스릴 있었다. 내 옆에 스페인 사람 2명이 있었는데 이들에게도 파도가 들이쳤고, 나랑 서로를 보며 웃겨서 깔깔거렸다. 여행을 하며 마음에 여유가 생겼고, 또 일행 없이 혼자다 보니 내 불편함을 혼자 감수하면 된다는 편안한 생각이 들어서인지 머릿속에 영화 한 장면처럼 행복한 장면으로 기록되었다. '이 순간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면, 마냥 싫은 상황은 아닐 수 있겠다' 싶었다. 


DAY11 : 길리에서 느낀 향수

하루 종일 길리 섬 한 바퀴 돌면서 동서남북으로 수영하고, 해 질 녘에 해변 승마를 하러 갔다. 말(벨라) 위에 앉아서 해변을 산책할 때 주황빛을 내뿜는 해가 서서히 바다로 내려오고 있었다. 말에서 내려 저녁 먹으러 길리 항구 쪽으로 걸어가는 동안 해는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이 더욱 강렬히 붉은빛을 뿜으며 바다 너머로 사라졌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마다 매료되어 하늘과 바다를 하염없이 쳐다봤던 것 같다. 문득 스페인 산세바스티안에서 본 붉은 저녁노을 하늘이 생각나면서 아련함을 한 스푼 더했다.

저녁을 먹고, 길리 밤거리를 즐기다가 레게톤에 이끌려 야외 펍에 갔다. 텐션을 끌어올리는 레게톤과 생기 넘치는 서양 관광객들, 마치 알고 있던 사이였던 것처럼 같이 춤추는 모든 장면들이 스페인에서 살던 모든 순간을 줄줄이 떠올리게 했다. 그 당시에 나는 걱정 없이 행복했고, 매 순간을 즐기기 바빴다. 동시에 학교 생활도 열심히 해보겠다고 학점도 많이 듣고 도서관도 자주 가고 그랬는데... 조금 덜 열심히 할 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마냥 좋았던 시간들이 떠오르며 몸은 길리에 있지만 잠시 스페인으로 영혼을 보낸 기분이 들었다. 한국도 아니고 스페인에 대한 향수를 길리에서 느끼다니! 한편으로는 내가 지칠 때 수시로 꺼내보던 스페인에서의 기억처럼 이곳, 발리와 길리에서의 기억이 앞으로 내게 큰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1초라도 놓치지 않고 만끽하겠노라 다짐하게 되었다. 


DAY12 : 자연이 주는 선물

전날에 이어서 노을을 보러 섬 서쪽으로 갔다. 걸으면서 예쁜 스폿이 있다 싶으면 멈춰 앉아 즐기다가 걷기를 반복했다. 전날보다 새빨갛게 불타오르는 하늘을 보니 멍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하늘을 본 적이 있던가? 바다에 비친 노을조차도 강렬함을 내뿜어 압도당했다. 이걸 보러 내가 여기에 있구나,라는 생각이 문득 스쳐 지나갔다. 앞으로 n 년 간 마음 다잡고 공부해야 하는 상황을 앞두고 하늘이 나에게 주는 선물인가 싶기도 했다.

동시에 이 황홀한 광경을 혼자 보고 있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몰려왔다. 최근에 계속 여행 같이 다녔던 엄마, 우리 여행 갈 때 종종 같이 안 가시겠다며 한국에 남아있던 아빠, 학교 기숙사에 들어간 승완이가 생각이 났다. 내가 이곳에 있을 수 있던 건 어쩌면 가족 덕분일 텐데 혼자만 누린다는 생각에 미안한 기분도 들었다. 물론 혼자 발리 여행하겠다는 것을 말린 사람도 없었고, 비용도 내 돈으로 가긴 했지만 건강하게 독립적인 아이로 잘 키워주셨으니까!  

아무튼 이런저런 감정이 동시에 뒤섞이며 나도 모르는 새 눈물이 났다. 슬픈 눈물은 아니고, 정말 자연에 감동받아 우는 그런 눈물이었다. 나는 자연을 통해 힘을 얻고 힐링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번 기회에 제대로 깨달았다. 이런 아름다운 장면을 다음에는 꼭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인 우리 가족이랑 보고, 다 같이 감동받고 힘을 얻어가야지!


DAY13 : 여유가 중요해도 내가 포기할 수 없는 것

여행 내내 평소의 '빨리빨리' 마인드와 다른 여유 있는 태도를 함양하고자 무던히 노력했고, 실제로 덕분에 마음이 편안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포기 못 했던 것이 하나 있다! 시간엄수를 위한 서두름. 전날 스노클링 투어하면서 만난 러시아 친구가 미팅시간에 늦지 않고 도착하기 위해 빠르게 움직이는 나를 보고 'Slow down'이라고 말하며 천천히 움직이는 걸 보고, 답답해 한 나를 보고도 느꼈는데 발리 돌아가는 날에도 한 번 더 느꼈다.

발리섬으로 돌아가는 배 보딩타임이 분명 11시 30분이었다. 보딩타임은 말 그대로 탑승시간이니 줄 서고, QR티켓 발권하고, 짐 싣고 하면 시간이 소요될 것이 분명했기에 나는 11시 즈음 항구로 가서 대기했다. 항구 입구에 있던 직원들이 11시 30분 오스티나보트면 대기해라, 11시 30분에 와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오잉 11시 30분이 보딩타임이 아니라 항구 입장시간이었던 것이야..? 나는 12시 출발 보트를 예약했는데... 30분 안에 모든 게 가능한가 싶었다. 한국 지하철과 달리 발리 보트는 현재위치나 연착 예정 여부 등을 알 수가 없으니 내가 나서지 않으면 낙오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통제권 안에 상황을 둬야 하는 J 모먼트 발동이었다. 안내받은 대기 장소(야시장)에 가서 11시 30분이 되기를 마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10분을 더 못 참고, 11시 20분 즈음 일어나서 항구로 갔다. 아니나 다를까 항구를 아직도 안 열어줬고 29분이 되어서야 열어줬다. 후다닥 티켓발권하고 대기했다. 배는 늦게 도착했고 승객과 짐 내리고, 다시 승객과 짐이 실리면서 출발이 1시간 늦어졌다. 여행 일정 자체는 열어두고 마음 닿는 대로 지내던 중이라 출발  시간 지연으로 인한 불편함은 없었다. 

여기서 나를 다시 돌아보며 확인한 것은 여유로운 태도로 살더라도 시간 엄수를 위한 서두름은 도저히 포기가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건 타인에게 서둘러 보일 수 있어도 내 마음이 편하고, 시간 엄수는 분명 좋은 습관이라고 생각하기에 억지로 바꾸지 않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DAY14 : 아, 맞다, 바다는 내 힐링템이었지

바다를 매일 가까이하겠다는 여행 초반의 나의 결심을 실천하며 매일 같이 바다에서 시간을 보냈다. 우리나라도 서해, 동해 그리고 남해 바다가 모두 특색이 다르듯이 발리에 있으면서 만난 바다마다 특색이 있어 질리지는 않았지만 어느 순간 바다에 익숙해졌다. 

발리에서 온전한 하루를 보내는 마지막 날인 만큼, 사누르 해변을 따라 걷다가 바다에 들어갔다가, 엎드려서 몸을 말리고 다시 걷기를 반복했다. 한량이 그지없었다. 그러던 중 문득 내일부터는 내가 사랑하는 섬이 되어 버린 발리의 바다를 들어갈 수 없음이 떠올랐고, 불안정한 현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새삼 느꼈다. 이후 한껏 아련하게 바닷속에 들어가 앉아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니 요동치려고 하던 마음이 가라앉아있었다. 맞다, 바다는 내 힐링템이었다. 앞으로 마음이 요동칠 날이 많을 것이 분명한데, 그럴 때면 이 순간을 꺼내봐야겠다고 되새기며 바다에서의 모든 순간을 곱씹어 선명하게 만들어두었다. 

내가 바다를 왜 좋아할까 생각해 보았다. 바다는 끝이 안 보이게 넓으며, 그곳에서 나는 작은 존재이다. 또한 주변엔 행복한 사람이 가득하지만 동시에 바다에는 희로애락이 담겨있다. 해변에는 해가 고스란히 들어와 몸과 마음을 쬐어준다. 이게 이유였다. 이유를 하나하나 떠올리며 바다와 모래를 온 힘을 다해 느끼고, 다시 피어오르는 근심과 우려를 그곳에 내려놓았다.


DAY15 : 내 제3의 마음의 안식처 

발리에서의 마지막 날, 믿을 수가 없었다. 어느 순간 발리는 나에게 대한민국-스페인을 잇는 다음 내 안식처이자 향수병 근원지가 되어버렸다. 공항에 입성하는 순간 서운함이 몰려왔다.

탑승을 기다리면서 발리에서 겪은 모든 순간과 인연들을 떠올려보았다. 발리에 관광객 대상으로 사기를 치는 경우도 종종 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나는 그동안의 여행지와 같이 좋은 인연만 한가득 만났다. 공항에서 만난 택시기사, 우붓 숙소 매니저, 꾸따 해변에서 만난 외국인 할머니와 친구들 무리, 누사페니다에서 만난 강아지, 서핑 강사, 꾸따 숙소 앞 펍 라이브 밴드, 짱구에서 처음 탄 고젝 기사, 짱구 숙소에서 만난 스위스 친구, 해변에서 만난 꼬마들, 옥수수 아저씨, 길리 항구 픽업 기사님, 길리 배에서 만난 스페인 사람들, 길리 첫 숙소 매니저들, 길리 해변에서 만난 아이들, 스노클링에서 만난 러시아 친구, 방갈로 숙소에서 벌레 잡아준 중국인 아저씨, 매일 아침 먹으러 간 길리 해변 카페 사장님, 사누르에서 만난 미술가 아저씨, 그리고 매번 이름 기억하고 불러준 친절한 마지막 숙소 호스트 메디까지! 사실 실시간으로 생각나는 인연만 나열해서 빠진 좋은 인연도 있겠지만 모두가 발리를 좋은 기억으로 남게 해 주었다. 한편으로 나도 누군가에게 좋은 기억의 한 조각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사람으로 더 성장해야겠음을 새겼다. 아무튼 사람도 좋았고, 음식도 찰떡같이 입에 맞았다 ㅎㅎ 동남아 체질이야.

좋은 인연과 맛있는 음식, 아름다운 자연을 뒤로하고 이렇게 발리는 아련한 내 도시가 되었다. 내 목표를 이루고 이곳에서 매 순간 다짐했던 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가족이랑 다시 갈 것이다!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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