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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쌤쌤 Nov 20. 2021

니는 사진 찍고 나는 시 쓰자

아침 먹고 백석, 점심 먹고 윤동주


 ‘싸우는 이유’를 한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이기든 지든 저 원(링) 밖을 나갈 때는 무서워하지 않으려고요.” 나는 무섭다 매일. 시가 동그랗든 네모든 시작했으니 겁난다. 십자가를 꿀꺽 삼키고 있는 절대딱지 한 장도 절실하고, 불안하면 왼 손에 꼭 쥐고 있던 바둑알도 찾아야 한다. 개처럼 돌아설 자신도 없어 할 수 있는 것, 직진만 하면서.

 

 센 주먹이 뒤로 가게 서면 권투가 되고, 센 주먹이 앞으로 가게 서면 영춘권이 된다고 적어놓고는, 편한 상대는 어디에도 없는데, 스텝은 엉키고 훅은 너무 커, 오늘 내 장점은 못 살렸어, 허리. 등. 무릎. 다리가 동시에 힘을 내야 촌경(가장 가까운 데서 공격하는 권법)이 돼,라고 혼잣말만 중얼거린다. 전부, ‘내가 시에게’, ‘시가 나에게’ 하는 말이다.


ㅡ 나의 글, 지금 가고 있는 중입니다에서ㅡ



아침 일찍 서포 대교를 건너온 사진에 늘 그렇듯 '백석 시인의 헤어가 이 늦가을에 쌈박하군!' 하는 답을 보냈더니 너는 또 이 말을 알아먹었다.


'파 머리'라고도 불렀었는데 '파'라니! 이렇게 잘 나온 머리인데,  요기 어디래요, 머리 맛집!


코로나 백신 얀센을 맞은 지 2개월 차라 추가접종으로 모더나를 맞고 집으로 오는 길 친구가 밥 먹고 들어가자 해서 우리는 망덕포구로 갔다. 망덕은 하동읍에서 섬진교를 건너 진월면, 광양시 진월면 망덕 길 249번지다.


속이 답답할 때 혼자 자주 갔던 곳이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인데


갈 때마다 뿌연 유리 창안으로 마루만 보고 와도 뭉클함이 있었다. 어제는 문화해설사가 영화 동주, 이상으로 세심하게 이야기해줘서 백신 맞은 어깨 통증을 잠시 잊었다.



하지만 마루를 새로 깔고 번질번질 손대 버려 속상했다. 시댁 마루라도 뜯어와 도로 옛 스럽게 돌이키고 싶은 마음들은 나만 그런 게 아니라 하여 너무 안타까웠다.


윤동주 시인의 대표작 19편이 수록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의 보존과 부활의 공간!


국문학자 정병욱 선생의 저서와 그의 문학적 역할도 커 이곳 망덕포구 정병욱 가옥(등록문화제 제341호)은 문화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



정병욱 선생은 시인의 연희전문 동기 강처중과 함께 유고 31편을 묶어 1948년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를 간행하였다.


동주야?

우리, 대학 가면

삼천리 같은 문예지 만들어서

니는 시 쓰고 나는 산문 쓰자!


당시, 신명동이라는 학생잡지를 만들고 있던 송몽규는 목사님께 빌렸다며, 동주에게 백석 시집을 줬다. 술가락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을 한 몽규와 동주.


국가가 되려면 뭐가 있어야 하니?


지식과 논리와 파이팅이 넘쳤던 몽규에게 선생이 물었고


국민,

국토,

주권 예,라고 몽규가 답했다.


주권 찾는 길을 알려줄까?

그 길을 갈 의지가 있느냐 말이다!


라고, 선생이 다시 물었다.


문익환은 신학대를 가고

윤동주는 시를 썼고

송몽규는 중국으로 갔다.




흰 그림자


윤동주


황혼이 짙어지는 길 모금에서

하루 종일 시들은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

땅거미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는 총명했던가요.


이제 어리석게도 모든 것을 깨달은 다음

오래 마음 깊은 곳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나를

하나, 둘 제 고장으로 돌려보내면

거리 모퉁이 어둠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는 흰 그림자


흰 그림자들

연연히 사랑하던 흰 그림자들


내 모든 것을 돌려보낸 뒤

허전히 뒷골목을 돌아

황혼처럼 물드는 내 방으로 돌아오면


신념이 깊은 의젓한 양처럼

하루 종일 시름없이 풀포기나 뜯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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