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필연적으로 진보하는가?
인간 이성에 대한 자의식 과잉
1. 서론
어떤 사람들은 역사가 자동으로, 필연적으로 발전한다고 믿는다. 그들에게 사회운동에 뜻이 있다고 얘기할 때마다 ‘그걸 굳이 너까지 나서서 해야 하냐?’라는 대꾸를 듣는다. 여성운동이든, 노동운동이든, 환경운동이든, 인종 운동이든 마찬가지다. 사회에 불만이 너무 많으면 스트레스를 곧잘 받으니, 신경을 가라앉히라든가 조용히 좀 있으라, 예민하게 굴지 말라는 얘기뿐 아니라 편향적으로 군다는 평가도 들었다. 그들의 주장이 뜻하는 바는 가만히 있어도 역사는 발전해 왔으니 굳이 나서서 긁어 부스럼을 겪을 이유가 없다는 낙관론인 동시에 무기력증이다. 그들은 조선 후기 신분제와 일제 강제 점령으로 고통받던 상황에서 독립을 맞이한 것, 6.25 전쟁으로 무너질 뻔한 나라가 현대에 이르러 경제 규모 10위권에 든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이러한 주장은 이성적인 모든 인간이 별도의 노력 없이도 경험에 기초한 학습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든다는 가설을 전제로 한다. 역사가 좌우로 갈팡질팡 움직이면서도 앞으로 나아간다는 얘기는 독일 철학자, 헤겔이 주장한 정반합 개념과도 일부 닿아 있다. 그는 역사가 이성적인 인간들의 사유와 행위로 진보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 했던 투쟁을 간과한다는 점과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는 전제 자체의 오류, ‘역사’라는 개념의 인간 중심주의적 정의라는 측면에서 합리적이지 않다. 더욱이 그러한 관점은 개인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을 과소평가하는 논리이므로 실천 윤리에서 비판점이 있다. 투쟁이 없으면 진보도 없다. 이 주장을 다음 세 가지 근거로 뒷받침하겠다.
2. 본론
(1) 본래부터 합리적인 인간 이성이라는 환상
모든 인간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전제는 환상에 불과하다. 기존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전제로 한 경제학은 소비자 심리학의 등장과 함께 많은 비판을 맞이했다. 사람들은 필요해서가 아니라 감정과 즉흥으로 제품을 구매한다. 이는 비단 경제 분야뿐 아니라 가짜뉴스 등 정치적인 부분에서도 확인되는 지점이다. 만에 하나 모든 인간이 이성적이라고 한들 그 이성이 정말 윤리적인 결말로 이어지는지 역시 의문이다. 이성적인 자가 도덕과 가깝다는 발상은 선을 알면 그것을 행한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지주의 윤리 이론을 뿌리로 한다. 그러나 비단 전쟁까지 가지 않더라도 횡령, 사기, 협박과 배임 등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을 했다고 믿는다. 이성을 최고도로 발휘해 자기에게 가장 유리한 길을 개척했기 때문이다. 현실 사회에서 이성적인 선택이 선한 선택을 뜻한다고 하기는 어렵다. 아주 중대한 금전적 이득과 사소한 도덕적 이득을 두고 후자를 택한 자는 이성적이라는 말보다는 미련하다는 평가를 듣기 마련이다. 또한 인간 이성이 합리적이라는 전제는 모든 인간을 협소한 ‘정상 인간’으로 뭉뚱그려 인식하게 한다. 그것은 이성적이지 못한 사람은 비정상이라는 인식을 내포한다. 어느 인간은 이성적이지만 어느 인간은 주관적이고, 어느 인간은 도덕적이지만 어느 인간은 비윤리적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합리적인 이성을 지닌 인간이 역사를 한 걸음 나아가게 한다는 명제는 그 전제부터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2) 그때보단 지금이 낫다는 맹목
역사가 결국은, 별도의 노력 없이 저절로 더 나아진다는 발상은 무방비한 낙관론이다. 이는 더 쉽게 말하면 ‘그때’보다는 ‘지금’이 낫다는 얘긴데, ‘그때’를 언제로 정하느냐에 따라 지금이 나은지 여부가 달라진다. 그때보다는 지금이 낫지, 라는 말은 차라리 그때가 좋았지, 로 바뀔 가능성이 충분하다. 지금이 낫든, 그때가 좋았든, 과거는 현재를 평가할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는 보편타당한 결론을 내릴 근거로 쓰기 어렵다. 만약 그러한 기준을 사용하려면 사회가 변화 없이 정체되어 있어야 한다. 비교할 만한 다른 집단이 존재하지 않아 판단 기준이 시간적 흐름이라는 단 하나의 축으로 고정될 때 이 근거는 타당하게 쓰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는 나라만 200개가 넘어가고, 사소한 집단까지 합치면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데 그 집단은 독립적이지 않고 유기적으로 교집합을 형성하며 얽혀 있다. 예컨대 국내 양성 임금 격차는 차츰 줄어들어 왔다. 그러나 이는 OECD 국가들 평균과 비교하면 한참 밑돌다 못해 갈수록 뒤떨어지는 실정이다. 단일 집단 내에서의 발전이 타 집단들이 보이는 발전 정도의 평균을 갈수록 밑돌게 된다면 그것은 발전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시간 흐름이라는 단일 조건 하나만으로 역사의 발전을 논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3) 갈등과 투쟁의 역사
민주주의, 법 앞의 평등, 기본권 등은 인류 문명의 가장 큰 발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성과 뒤에는 민주화 운동, 시민혁명 등 각계각층 시민들의 투쟁이 있었다. 역사는 작용과 반작용이라는 필연의 반복이므로 무엇 하나 어쩌다 아무 생각 없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없다. 변화에는 시작 작용이 필요하다. 헤겔이 주장했듯, 역사는 정, 반, 합의 반복으로 진행되었다. 정이 없으면 반이 없고, 반이 없으면 합이 없으며 합이 없으면 정이 없다. 이 순환은 얼핏 보면 너무 자연스러워서 당연히 그렇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든 단계는 작용이 결과다. 자동문 원리를 모르는 사람은 가까이 가면 당연히 자동문이 열리는 줄 알지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센서가 자기를 인식하고 기계 장치에 자극을 전달하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찬가지로,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관찰하면 그 모든 인간 사회 변화와 움직임 뒤에 미세한 갈등과 투쟁이 얽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역사가 별다른 노력이나 작용 없이 필연적으로, 저절로, 자연스럽게, 당연히 발전한다는 주장은 사람들이 변화를 거부하고 현재에 안주하게 한다. 모든 권리는 투쟁으로 발생한다. 이전 세상에서의 ‘당연함’을 누리고 있던 이들은 결코 그 보편타당함을 나누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피지배자, 피통치자들에게 너는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으니 가만히 있으라고 주입한다. 이는 바꿔 말하면, 갈등을 일으키고 투쟁해도 변하는 게 없다는 무력감을 미리 학습시키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세뇌당한 수동적인 사람들은 권력자의 훌륭한 먹잇감이 될 뿐이다.
3. 결론
역사는 노력으로 발전한다. 만약 영국 여성들이 투표권이 없는 현실에 순응하고, 언젠가 생기겠거니 하며 안주했다면 서프러제트는 물론 여성 참정권도 없었을 것이다. 영국까지 가지 않고 국내를 봐도 마찬가지다. 군부독재에 부역하는 학교 교육 체제에 반기를 든 학생 인권 운동이 없었다면 지금까지도 학생들은 폭력적인 교육 환경에 놓여야 했을 것이다. 퇴보를 경계해야 진보를 논할 수 있다. 역사는 투쟁으로 발전한다. 어쩌면 투쟁이 아니라 다른 원인이 있을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방관과 게으름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세상을 나아가게 하는 건 냉소와 비관 따위가 아닌, 논의와 연대, 공감과 행동이다. 그러므로 역사가 합리적인 인간 이성에 의해 필연적으로 진보한다는 명제는 환상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