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미라큘러스: 레이디버그와 블랙캣

세상에, 레이디버그가 ______에 갇혔어요!

by 기미상궁 라하
레이디버그1.jpg 미라큘러스: 레이디버그와 블랙캣 공식 이미지

들어가며

올림픽 개막식에는 곧잘 그 나라를 대표하는 캐릭터들이 나오곤 한다. 이번 프랑스 파리 월드컵 예고 영상이 공개될 당시 화제로 떠오른 캐릭터가 있다. 7세 이용가 청소년 영웅 애니메이션인 ‘레이디버그’다. 그녀를 코스프레한 사람들이 나올 것을 전세계의 레이디버그 팬들이 기대했다. 애니메이션의 감독은 스파이더맨과 캣우먼에서 영감을 받아 레이디버그와 블랙캣을 디자인했다고 한다. 두 인물 중 주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레이디버그, 즉 마리네뜨 뒤펭 챙을 얘기하려 한다.

레이디버그는 명실상부한 영웅이다. 파리 시민들이 악당 호크모스의 검은 나비에 오염되어 그의 하수인이 되면 레이디버그는 그들을 감염시킨 검은 나비를 찾아 정화해 원래대로 되돌린다. 파리 시민들은 레이디버그와, 파트너인 블랙캣을 영웅으로 여긴다. 레이디버그는 블랙캣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시내를 누비며 간단한 치안 문제부터 크게는 호크모스의 검은 나비 정화까지 온갖 일을 도맡는다. 둘의 정체를 알아내려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은 아슬아슬하게 피해 일상을 유지한다.

14세 청소년 마리네뜨 뒤펭 챙은 프랑스인 아버지와 중국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인물이다. 파리 시내 빵집 딸인 그녀는 내성적이고 곧잘 덤벙거리는 성격으로, 못된 아이들에게 종종 괴롭힘을 당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영웅으로 선택받은 사실을 거부하고 이를 남에게 떠넘기려고 하지만 가장 친한 친구인 알리야가 호크모스에게 당하자 운명을 받아들이고 영웅, 레이디버그로 거듭난다.


레이디버그2.png 미라큘러스: 레이디버그와 블랙캣 공식 이미지

이중생활

유독 청소년 영웅 캐릭터들은 이중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마리네뜨는 좋아하는 남학생 앞에서 말 한마디 못 하는 어리숙한 인물이지만 레이디버그는 지략과 용기로 악당을 무찌르는 영웅이다. 이는 스파이더맨, 대니팬텀 등 다른 청소년 영웅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소시민과 영웅의 특징을 모두 갖고 있어 필연적으로 정체성 혼란을 마주한다. 이는 청소년 대부분이 겪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을 상징하는 듯하다. 마리네뜨는 영웅, 다문화가정의 딸, 학생, 친구, 시민 등 여러 정체성을 갖고 그 중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을 맞닥뜨리는데, 여기서 그녀의 욕망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감독은 마리네뜨를 등장시켜 청소년 시기의 고민을 수면 위로 떠 오르게 한다. 더불어 영웅과 일반인을 왔다 갔다 하는 탓에, 어디에도 끼지 못하는 중간자적 성향을 얘기하고 있다.

마리네뜨는 여느 청소년 영웅과 마찬가지로 가족이나 친구에게도 정체를 드러내지 못한다. 이 사실은 그녀를 외로움에 빠뜨린다. 본인을 포함해 그 누구도 그녀의 본질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족은 물론 친구들도 마리네뜨와 레이디버그를 사랑하지만 그들은 마리네뜨이면서 레이디버그인 사람은 모른다. 이런 외로움과 맞물리는 주변 상황은 애니메이션 레이디버그에서 주인공의 내적 갈등을 야기하고 시청자가 마리네뜨에게 이입하게 한다.


욕망

마리네뜨의 욕망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같은 반 남학생 아드리앙에 대한 짝사랑이다. 아드리앙은 준수한 외모에 훌륭한 성적과 신사적인 인성을 가진 남자 주인공이다. 마리네뜨는 몇 번이고 아드리앙에게 마음을 전하려 시도하지만, 매번 실패한다. 마리네뜨가 레이디버그로 변신하면 그녀의 원래 욕망은 우선순위가 뒤로 밀린다. 파리 시내를 수호하는 레이디버그의 가장 큰 욕망은 호크모스에게서 나비 미라클스톤을 도로 빼앗아 평화를 이루는 것이다. 블랙캣의 미라클스톤과 레이디버그의 미라클스톤을 같이 갖는 자는 그것을 제물로 소원을 빌 수 있기 때문에 블랙캣과 레이디버그는 서로의 정체를 모른 채 함께 활동한다. 마리네뜨든, 블랙캣인 아드리앙이든 서로 공모해 미라클스톤을 빼앗으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둘은 욕심보다 대의를 위하는 영웅으로 묘사된다.

영웅으로서의 욕망은 여느 영웅물과 다르지 않지만 그들이 일반인일 때 갖는 욕망은 다소 결이 다르다. 아드리앙의 욕망은 화목한 가정을 회복하는 것이고 마리네뜨의 욕망은 앞서 쓴 바와 같다. 아드리앙의 욕망은 그의 세계를 기준으로 형성되어 있지만 마리네뜨의 욕망은 아드리앙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가장 무서워하는 것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에서 그녀의 가장 큰 두려움이 ‘아드리앙이 클로이 부르주아를 사랑한다.’였다.

감독은 마리네뜨에게 10대 소녀들이 공감하기를 바란 듯하지만, 사랑을 중심으로 빚어진 캐릭터 형상화는 다소 형편없다. 마리네뜨는 아드리앙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데 영웅의 능력을 쓰거나 그에게 구애하는 아이들을 방해하기도 한다. 감독이 조금만 더 신경 썼다면 요즘 10대 소녀들에겐 짝사랑 이상으로 중요한 이슈가 많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꽤 고전적인 연출이라도, 마리네뜨가 사랑만을 위해 벌인 의아한 행동들만 없었다면 더욱 완성도 있었을 것이다.


러브 스퀘어

블랙캣의 구애를 그러려니 넘기는 레이디버그가 같은 사람인 아드리앙을 짝사랑하는 사각관계, 소위 ‘러브 스퀘어’는 이 작품의 흥행 요인 중 하나였다. 마리네뜨와 레이디버그가 아드리앙을, 아드리앙과 블랙캣이 레이디버그를 짝사랑한다는 점에서 발생하는 아슬아슬한 장면들이 시청자에게 스릴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마리네뜨가 아드리앙에게 구애하며 여러 사고를 치는 반면 아드리앙은 얌전히 이상적으로 레이디버그에게 구애한다는 점은 여전히 의문이다.

감독은 기존 스파이더맨과 캣우먼의 역할을 반전해 캐릭터를 만들었다며 남성 영웅들이 넘쳐나는 세상에 여성 청소년 영웅을 내놓고 싶었다고 포부를 밝혔다. 하지만 당찬 외침과 달리 마리네뜨는 꽤 전형적인 순정만화 여주인공이다. 감독이 더 시간을 들여 플롯을 짰다면 마리네뜨의 내면 갈등에 초점을 뒀을 것이다. 아드리앙은 어머니의 실종 이후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만 마리네뜨에겐 그녀를 괴롭히는 학우와의 다소 일상적인 갈등의 전부다. 캐릭터의 외적 갈등을 설정하느라 내적 갈등을 소홀히 한 탓에, 시청자의 연민은 마리네뜨보다 아드리앙에게 향할 가능성이 크다. 이 사실은 마리네뜨의 모든 행동을 가볍게 인식시키고 감독은 그녀의 특별함을 보여주기 위해 더욱 자극적인 소재를 취하게 된다. 아드리앙에게 구애하는 여학생을 방해하는 건 그럴 수 있는 행동이지만, 한 시즌의 모든 에피소드가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은 큰 문제다. 오히려 평소에는 덤벙거리는 마리네뜨가 사랑에 있어서는 순수하게 자기 혼자 노력하려 했다면 그녀는 더 많은 호감을 샀을 것이다.

레이디버그3.jpg 미라큘러스: 레이디버그와 블랙캣 공식 이미지

마치며

마리네뜨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주변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10대 소녀에 평범하다는 공식 설정이 그녀를 공감을 사는 인물로 만들었다. 평소의 부주의함을 찾아볼 수 없는 레이디버그의 철두철미한 계책이 도드라질 때면 팬들은 그녀의 이중적인 매력에 환호한다. 그러나 레이디버그를 세상에 내놓은 감독은 시대를 역행하고 있다. 괴상한 보라색 스튜를 만드는 중국인 요리사, 왕관을 쓰고 하이힐을 신은 아이스 레이디버그, 오직 사랑을 위해 절도도 마다하지 않는 마리네뜨 등. 감독은 영웅인 레이디버그가 아닌, 그의 상상 속 여성인 레이디버그를 보고 그대로 형상화하고 있다. 동양인 인물들을 째진 눈에 남색 머리칼로 표현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 시즌1에서 보인 영웅 레이디버그를 고작 사랑에 목매다는 어리숙한 소녀로 전락시킨 것은 팬들에겐 대역죄로 보일 만하다.

영웅 레이디버그는 ______에 갇혔다. 인종차별에, 중년 이성애자 남성 감독에게, 사랑에, 여성성에 갇혔다. 지금 이 상태를 유지한다면 레이디버그는 채집망 안의 무당벌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무당벌레가 고운 색을 입은 것이 인간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듯, 레이디버그가 존재하는 이유도 무언가의 대상이 되기 위함이 아니다. 그녀를 가둔 모든 창살을 깨는 것은 TV 화면 밖 시청자들의 일이다. 지난 번 ‘#레이디버그는_공주가_아니다’ 해시태그가 돌아다니던 것처럼 무수한 노력이 뒷받침될 때가 되어서야 레이디버그가 레이디버그일 수 있다는 사실은 씁쓸한 현실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