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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홀로길에 Sep 09. 2024

돌다 돌다 돌아버리겠네!

레온 - 산 마르틴 델 카미노 27.9km

마을에 유일한 Bar였다. 다시 출발한 지 두 시간 만에 만난 이곳은 시골 기차역 대합실처럼 생긴 길고 텅 빈 곳에 테이블 몇 개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다행히 밖에도 자리가 마련되어 있어 비교적 많은 사람이 앉아 쉴 수 있었다. 하지만 순례길이 아니라면 운영이 힘들어 보일 정도로 외진 곳이었다. 난 구석진 빈자리에 자리를 잡고 또르띠아와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남은 길이 얼마나 되는지 휴대전화로 확인하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하루를 더 쉬어서인지 일어나는데 한결 몸이 가벼웠다. 어제 만난 이십 대 한국인 친구들은 이미 출발했는지 침대가 비어있었다. 한 명은 군대를 전역하자마자 바로 순례길에 왔다고 했고, 그보다 두 살 많았던 또 한 명은 순례길에 오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2년간 했다고 말했다. 갑자기 나는 그 나이에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궁금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별생각 없이 하루하루 보낸 기억뿐이다. 그런 내가 후회스럽기도 하고, 이런 여행을 실천한 그들이 부럽기도 했다. 알베르게를 나서니 레온의 아침은 유난히 맑고 밝았다.



어제 잠들기 전 휴대전화로 가야 할 길을 보니, 레온 시내를 빙 돌아가는 길이었다. 순례길에 와 처음으로 난 잔머리를 굴렸다. 지도를 보니 내가 있는 알베르게에서 왼쪽 도로를 따라 계속 직진하면 레온 시내를 한 바퀴 돌아 나오는 정규 루트와 다시 만나게 되어 있었다. 무려 3km를 단축할 수 있었다. 머릿속에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가 마구 날아다녔다. ‘어제 하루 종일 레온시내 구경했는데 그 길을 또 가?’



출근하는 레온 사람들의 차들로 꽤 붐비는 도로 옆으로 계속 걸었다. 내 주위엔 단 한 명의 순례자도 없었다. 아니 걷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기찻길도 지나고, 레온 투우 경기장도 지나고, 한참을 더 걷다 보니 이제 큰 건물이 보이지 않는 언덕길로 접어들었다. 계단을 올라가면 드디어 시끄러운 도로를 벗어나는 거였다. 어! 사거리여야 하는데 삼거리다. 내가 가야 할 곳엔 길 대신 높은 언덕이 자리 잡고 있었다. 몇 번을 다시 봐도 길이 없었다.



다른 길을 찾기엔 모험이었다. 거리를 줄이려고 애써 이곳까지 왔는데, 헛수고가 되어버릴 위기였다. 언덕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강아지 한 마리가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한두 번 다닌 솜씨가 아니었다. 난 홀린 듯 그 강아지를 따라 언덕에 발을 디뎠다. 미끄러질까 한 발 한 발 조심하며, 강아지가 갔던 길을 따라 네발(?)로 걸어 올라가는 데 성공했다. 3km를 줄여보겠다는 강력한 의지였다. 



집들이 몇 채 있는 작은 동네를 지나니, 수풀 사이로 조그만 길이 계속 나 있었다. 도대체 이런 길을 지도에 어떻게 표시한 걸까 궁금했다. 처음부터 길이였다기보다는 사람들이 다녀 저절로 길이 된 듯한 좁디좁은 길인데 말이다. 슬슬 여기로 온 걸 후회하고 있을 때쯤, 다시 도로를 만났다. 도로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눈앞에 처음 보이는 Bar에 잠시 쉬어가기 위해 들어갔다. 두어 시간 동안 길을 잃을까 노심초사하며 긴장했던 탓인지 다리에 힘이 풀려 어디든 빨리 앉고 싶었다.



힘을 내 다시 출발하려 Bar를 나서는데 먼저 출발했던 한국인 청년이 내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 친구는 나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자기도 그렇게 할까 하다가 길을 잃을까 봐 그냥 남들 따라 걸어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게 어느 길로 갈 거냐고 물었다. 곧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데, 정규 루트는 도로 옆을 계속 걸어야 하고, 다른 한 곳은 풍경이 괜찮다는 정보가 있다고 말하며, 대신 조금 더 걸어야 한다고 귀띔해 줬다.



이왕이면 좋은 풍경이 보고 싶었다. 단순한 이유로 난 두 번째 길을 선택했다. 갈림길 이정표가 나왔고, 그곳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 한 장 찍고 다시 출발했다. 적당한 바람과 그늘, 적당히 거친 땅. 메세타 평원을 지나니 풍경이 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걸을 때마다 일어나는 흙먼지로 인해 신발과 바지 밑단은 이미 황토색이 된 지 오래였다. 지칠 때쯤 마을이 나타났고, 난 그 대합실처럼 생긴 Bar에서 남은 맥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이상한데? 휴대전화에 내가 가야 할 알베르게의 위치와 나의 현재위치가 너무나 멀었다. 한참을 이리 보고 저리 보다 뭐가 잘못된 건지 그제야 알아차렸다. 내가 예약한 알베르게는 정규 루트로 가야만 하는 마을에 있었고, 난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 마을은 버스가 올 것 같지 않은데? 택시를 불어야 하나? 돌아가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구글맵을 켜서 길 찾기를 해보았다. 구불구불 길이 있긴 하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휴대전화의 지시대로 난 오른쪽 길로 접어들었다. 잡초가 허리까지 올라오는 길을 따라 걷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나를 불러댔다. 내가 멀어질수록 목소리도 같이 커졌다. 뒤를 돌아보니 처음 보는 순례자 십여 명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내가 잘못 가고 있다며 제발 돌아오라며 손짓하고 있었다. 난감하네. 난 아무렇지 않은 척, 등산스틱을 높이 들어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외쳤다. “My way!”



PS. 내가 가야 할 곳이 어느 길 위에 있는지 몰랐던 것이 화근이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구글맵 하나에 의존해 계속 걸었다. 길인지 아닌지 모를 길을 그저 묵묵히 걸었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황량한 그 길을,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 그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작은 마을이 느닷없이 나타났다. 걸어오는 내내 보이지 않던 마을이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났다.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인가? 너무 조용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오직 내 발걸음 소리뿐. 마을의 끝자락에 가서야 한 사람이 보였다. 그 사람은 내가 지나갈 때까지 한참을 쳐다봤다. 순례길도 아닌 이곳에 낯선 아시아인이 나타나니 경계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난 무심히 지나쳤다. 인사할 힘도 기운도 없었고, 그럴 기분도 아니었다. 돌아 돌아 도착한 알베르게. 3km를 줄여보겠다고 아침부터 길을 만들어가며 걸었는데 결국 4km를 더 걸은 셈이 돼버렸다. 욕심을 부린 결과는 처참했다. 내가 가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가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갈림길의 이정표에서 사진도 찍었는데, 정작 내용엔 관심도 없었다. 어쩌면 순례길을 걷고 있는 내 겉모습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데만 온통 신경을 쓰고, 이 길의 본질과 나의 내면에는 소홀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이런 게 인생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때로는 남들과 다른 나의 길을 가야 하기도 한다. 결국 우리는 모두 죽음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종착역을 향해 가고 있다. 내가 가보고 싶은 길로 과감히 가보자. 남을 의식할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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