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마르틴 델 카미노 - 아스토르가 24.8km
전날 길을 헤맨 탓에 피곤했는지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아침에 눈을 떴다. 내가 있던 방은 이층침대 4개가 있던 곳이었다. 아무도 일어난 사람이 없었다. 난 흔들거리는 침대의 이층에서 조심조심 내려왔다. 해가 뜨기 전이라 방안은 어두컴컴했다. 문을 살포시 열고 밖으로 나오니 다른 방 하나가 시끌벅적했다. 방 안쪽에서는 어디선가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 중국인 무리였다. 나와 같은 방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곧 해가 뜰 모양인지 동쪽 하늘에 있는 구름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일출을 보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난 멈추어 선 채 한동안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바라봤다. 마침, 길 건너편에 있던 Bar에 불이 켜졌다. 영업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색에 작은 체구의 주인장은 콜롬비아 출신인 여자였다. 콜롬비아도 스페인어를 사용해서인지, 이곳 스페인에 콜롬비아 사람이 참 많았다. 난 카페 콘레체와 토스트 하나를 주문했다.
아침이라 기온이 꽤 내려가 쌀쌀했다. 점퍼의 지퍼를 올리는 날 보더니 그녀는 히터를 틀어줄까? 물었다. 난 괜찮다고 대답하고 토스트를 마저 먹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가게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있었다. 히터는 됐고, 아무도 없는데 내가 나간 후에 청소하면 안 되겠니? 그녀는 청소를 멈출 것 같지 않았고, 난 서둘러 먹어야 했다. 불을 켜자마자 들어온 나의 실수였다. 그래도 토스트 솜씨는 괜찮았다.
금세 날이 환해졌다. 한동안 도로 옆으로 난 길을 걸었다. 가끔, 경적을 울리며 달려오는 트럭 운전자들이 창밖으로 순례자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도로를 벗어나 걷다 보니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라는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어귀에 있던 Bar에 들렀다. 멋진 정원이 있는 그곳은, 건물이 그늘을 만들어 줘서 햇빛을 피해 정원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잠시 앉아 맥주를 한잔 마시고 있는데, 특이하게 생긴 녀석이 내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닭이었다. 여러 마리가 자유분방하게 정원을 노닐고 있었다.
닭들은 희한하게도 문이 열려있는데도 불구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색깔도 제각각에 모양도 제각각이었다. 한 마리는 온통 검은색이었는데, 이곳의 대장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윤기 나는 깃털에, 벼슬 또한 검은색이었다. 내가 본 닭 중에 가장 폼나게 생긴 닭이었다. 걸음걸이도 경망스럽지 않게 느긋함을 유지했다. 난 오래전 싸움닭에게 쪼일 뻔한 경험이 있어서 가까이 가지는 못한 채 멀리서 지켜볼 뿐이었다.
Bar를 나오다가 문 옆에 펼쳐져 있던 방명록을 발견했다. 각각의 언어로 자신의 발자취를 남겨 놓았다. 한두 장 넘겼을까? 낯익은 이름들이 보였다. 아! 이 친구들 벌써 이틀 전에 여기를 지나갔구나. 젊음이 좋긴 좋네. 이제 나와 그들과는 순례길을 걸을수록 거리가 멀어져 갈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사람의 인연이 나만의 노력으로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닌 데다가 그들도 그들의 길을 걸어가야 하니 어쩔 수 없다.
마을 중간에 강이 있었는데, 그곳을 건너가는 길고 높다란, 돌로 지어진 근사한 다리가 있었다. 지금은 강의 수량이 많지 않았지만, 다리가 이렇게 길고 높은 이유가 있을 법했다. 아마 비가 많이 오는 겨울 우기를 대비한 것처럼 보였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순례길이 지나가는 마을들은 낮에 현지에 사는 사람을 보기 힘들었다. 골목마다 송아지만 한 커다란 개들이 돌아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삼십여 분 정도 걸었을 때, 다시 마을이 나타났다. ‘비야레스 데 오르비고’. 아까도 오르비고 였었는데? 이곳은 집마다 정원에 예쁜 꽃을 장식한 곳이 많았다. 마을 곳곳에 아기자기한 장식과 특이한 소품들도 많아 볼거리가 풍성했다. 마을을 구경하며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덧 마을은 끝나고 작은 도로가 하나 나타났는데, 바닥에 저쪽이 순례길이라는 화살표가 커다랗게 페인트로 그려져 있었다. 눈을 들어 보니 꽤 높아 보이는 산이었다.
가파르지는 않았지만, 언제까지 올라가야 끝인지 알 수 없는, 돌밭으로 된 언덕길을 하염없이 오르고 또 올라갔다. 중간중간 있는 외양간에서 나오는 향기는 덤이었다. 그러고 보니 길 위에 있던 흙뭉치들이 흙이 아니었다. 바람이 부는데도 냄새가 없어지지 않던 까닭이 있었다. 그나저나 이 언덕은 언제 끝나는 걸까? 스페인에서는 용서의 언덕처럼 700m쯤 올라야 언덕 취급을 해주는 건가?
한참을 가다 보니 십자가가 보였다. 대부분 십자가가 세워진 곳에서 내리막이 시작됐던 경험이 있었기에 내심 기쁜 마음으로 십자가 앞까지 올라갔다. 예스! 드디어 내리막이다. 잠시 쉬어갈까, 생각도 했지만, 구름이 잠시 해를 가리고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걷기로 했다. 가다 보니 주변에 밭뿐인 길 한가운데 노점상 같기도 하고 그냥 가게 같기도 한 곳이 나타났다. 커다란 원형 테이블에 과자와 과일, 각종 먹거리가 놓여 있었다. 벽 한쪽에 선명하게 쓰여있는 ‘FREE’라는 글자와 함께.
순례자들이 마음껏 먹고 쉬다 가도록 배려한 이곳의 정체는 뭘까? 궁금했다.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으니 한쪽에 살랑살랑 흔들거리는 해먹이 보였다. “올라” 인사를 건네니 해먹 안에서 누군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반갑게 손을 흔들며 해먹에서 내려와 내게 마음껏 먹으라며 이것저것 건넸다. 그는 몇 년 전 순례길을 걷다가 이 길에 매료되어, 이곳에 정착해 간단한 농사와 기부를 받아 운영한다고 말했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양이 참 여러 가지다. 그는 물질에 대한 욕심이 없기에 이런 삶이 값지고 행복하다고 느낄 것이다.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아가는 그는, 고맙다고 인사하는 내게 해맑게 웃어 보이며 더 많이 먹으라고 권했다. 아마도, 나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나눔이 지금까지 걸어온, 그리고 앞으로 걸어갈 험한 이 길에 힘이 되어줄 것은 확실했다. 아직도 활짝 웃으며 나와 같이 사진을 찍던 그가 생각난다.
‘아스토르가’. 오늘 머물 도시다. 오래된 도시답게 가운데로 갈수록 위로 솟아있다. 내가 예약한 알베르게는 아스토르가 대성당 앞에 있다. 즉, 이곳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 눈앞에 도심으로 올라가는 거대한 계단이 나타났다. 뜨거운 태양 아래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갔다. 조금 전까지 바람이 불어준 덕분에 시원했는데, 지금은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돼 버렸다. 중심부로 올라가는 모든 길이 마치 부산 감천동을 닮았다.
리셉션에 있던 호스트 할아버지는 나를 알베르게 이곳저곳에 데리고 다니며 안내했다. 주방과 샤워장, 화장실과 빨래를 어디서 하는지. 마지막으로 내가 잘 침대를 알려주고는 돌아서며 한마디 덧붙였다. 여기는 13세기에 지어졌고 오래되고 많이 낡아 바닥이 삐그덕거리니 조심히 걸으라고 했다. 2층은 이층침대였고, 3층 다락방엔 내가 원했던 단층 개인 침대가 놓여 있었다. 나는 다락방 가장 안쪽에 있는 침대를 골랐는데, 한번 나갈 때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됐다. 여기 안 무너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