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아프랑카 델 비에르소 - 라 라구나 23.6km
마지막 급경사 300m가 남았다. 그런데 또다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소나기가 아니었다. 경사가 심한 산길을 이런 빗길에 오르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됐다. 난 순례길을 걷는 동안 처음으로 택시를 타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경사가 높아 ‘라 라구나’보다도 더 올라가야 하는 ‘오 세브리오’까지 택시를 타는 사람이 있었기에 나는 일부러 도로 쪽으로 걸어가며 계속해서 뒤를 돌아봤다.
곧 도로는 끝나고 산길로 접어드는데, 택시는 고사하고 누구 하나 지나가지 않았다. 산길로 가는 입구에 잠시 섰다. 마침, 차 한 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택시였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손을 흔들어댔다. 하지만 택시 운전사는 나에게 손을 흔들며 승차를 거부하였다. 승객이 타고 있었다. 마을을 한참 벗어난 지점이라 콜택시의 전화번호를 몰랐던 나는 멀어져 가는 택시의 뒷모습을 보며 산길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빗줄기는 갈수록 거세지고 있었다. 어차피 내 발로 걸어가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니 오히려 맘이 편했다. 잠시 택시를 탈 생각을 한 것이 창피해졌다. 눈앞에 펼쳐진 위기를 정면돌파하기보다 편하게 피해 갈 방법을 본능적으로 떠올리는 반응이 나와버렸다. 난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며 수많은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항상 피할 방법을 찾았다. 아무 문제 없이 잘 피하고 나면 스스로를 대견해했다.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정면돌파 했다면 나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궁금해졌다.
어쨌든 오늘의 선택은 정면 돌파였다. 어서 이 비를 뚫고 가파른 산길을 올라 나에게 편안한 쉼을 안겨주고 싶었다. 택시를 타고 편안하게 가는 것보다 이 상황을 극복해 내는 것이 나에게,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사람들에게 자랑스러운 무용담을 들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길은 예상대로 진창길이었다. 행여 미끄러질까 등산스틱을 단단히 부여잡고 한 걸음 한 걸음 조심히 걸었다. 다행히 울창한 나무숲이어서 그런지 오히려 비를 덜 맞을 수 있었다.
숲에 떨어지는 빗줄기는 나뭇잎을 요란스럽게 흔들어댔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은 나뭇가지에 위태롭게 매달려 춤을 추는 잎사귀들 사이를 빠르게 날아다니며 소란을 떨고 있었다. 그 소리가 마치 거대한 폭포 아래에 서 있는 것처럼 나를 압도했다. 뒤를 돌아보니 나를 따라오는 사람도, 앞에 가고 있는 사람도 없었다. 나 혼자 길을 잘못 든 것처럼 그 많던 사람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난 할 수 있다’를 속으로 되뇌며 이 두려움에 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비를 맞으며 올라가는 동안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오직 디뎌야 할 곳만 쳐다보며 무거워진 발을 옮기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덧 가파르고 긴 숲을 빠져나왔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정말 뚝! 하고 그쳤다. 푸른 풀밭과 탁 트인 시야가 쿵쾅거리는 가슴을 비로소 안심시켰다. 앞에 ‘라 라파’라는 마을이 보였다. 골목을 지나가는데 독일인 니콜이 보였다. 그녀는 이곳에서 잔다고 했다. 이미 짐을 풀고 마을을 구경하러 나온 모양이었다. 부러웠다.
이제 급경사는 없겠지? 얼마 가지 않아 그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 올라올 때 만난 경사가 다시 나타났다. 그래도 다행인 건 비가 그쳤다는 것이다. ‘라 라파’에서 잔 사람들은 내일 아침 이 경사를 올라와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조금은 위로가 됐다. 뭐랄까 매를 먼저 맞는 느낌이랄까? 어쨌든 이 길이 경사가 심해 힘들기는 해도 경치가 너무 좋았다는 글을 봤었다. 하지만 안개가 너무 자욱해서 그 소문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드디어 도착한 ‘라 라구나’. 이 마을에 알베르게는 단 한 군데뿐이었다. 예약하지 않고 이곳에 왔다가 침대가 없으면 낭패인 곳이었다. 콜롬비아 출신 호스트가 날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스페인어를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매우 밝고 긍정적인 사람처럼 보였다. 알베르게는 무척 깨끗하고 좋았다. 안내된 방에는 이미 몇 사람이 쉬고 있었다. 안면이 있는 프랑스 사람이 침대에 기댄 채 나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온통 젖은 옷을 다 벗어던지고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나니 하루의 피로가 말끔히 씻겨 나갔다. 보통은 내가 직접 손빨래를 하는데, 오늘은 그럴 힘이 없었다. 이곳은 호스트에게 빨래를 맡기면 세탁과 건조까지 해서 내가 있는 방까지 가져다주었다. 이제 저녁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그러기엔 시간이 애매했다. 그래서 난 1층에 있는 Bar에 내려가 맥주 한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여기 앉아 있는 내가 스스로 대견했다.
피곤했는지 언제 잠든 줄도 모르게 일찍 잠이 들었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일어났는데,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그림 같았다. 난 홀린 듯 밖으로 나왔다. 잔디밭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쏟아지듯 많은 별이 있었다. 그 요란하던 비도 바람도 없는 정말 고요한 밤이었다. 달빛이 하늘에 떠 있는 흰 구름 사이로 내가 서 있는 곳을 환하게 비췄다. 포기하고 싶었던 수많은 순간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살아오면서 이런 만족감과 성취감은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