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아 - 포르토마린 22.4km
아침부터 시끌벅적했다. 사리아에서부터 순례길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오늘이 첫날이라 의욕이 넘쳐났다. 다른 사람도 자신들처럼 순례길을 걷는 첫날일 거라 확신에 찬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표정은 들떠있고 모든 행동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이미 한 달째 산전수전 다 겪은 순례자들은 그들을 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 저녁이면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엄청난 하루를 겪었다며 떠들 것이 분명했다.
배낭을 메려고 하는데 바람막이 점퍼 윗주머니에 뭔가가 만져졌다. 평소에 사용한 적이 없던 주머니라 의아했다. 꺼내보니 카드였다. 이게 뭐지? ‘alda hotels’. 아차 싶었다. 폰페라다에서 머물렀던 알베르게 카드를 가지고 온 것이었다. 이미 며칠 지났는데 왜 여태 몰랐는지 의문이었다. 난 예약했던 왓츠앱으로 호스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미안합니다. 알베르게 카드를 제가 그냥 가져왔어요. 우체국이 나타나면 꼭 보내드릴게요.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한동안 이름 모를 스페인 아저씨와 같이 걷고 있었다. 서로 속도가 비슷하기도 했지만, 며칠 남지 않은 순례길을 차분히 느끼고 싶어 천천히 걸었던 이유도 있었다. 철길을 건너며 길이 갈라졌는데 표지석을 보지 못했다. 그럼, 직진이지. 그 스페인 아저씨도 나를 보며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이내 정면을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다. 까마득하고 가파른 언덕이 버티고 있었다. 숨이 가빠오고 땀이 나기 시작했다. 십여 분 동안 허벅지가 터질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계속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그런데 저 위에 진작 나를 앞질렀던 사람들이 모두 서 있었다.
난 순간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얼른 휴대전화를 꺼내 까미노앱을 열었다. 응? 가야 할 길을 지나쳐 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 다들 길이 사라져서 당황한 채 그곳에 서서 이야기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재빠르게 뒤돌아 그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순례길에서 배운 또 한 가지가 빨리 포기하는 것이었다. 생각이 많으면 시간만 지체되고 후회만 늘어남을 깨달았다. 다시, 갈림길이 있었던 철길까지 내려왔다. 표지석을 찾아보니 웬걸 철로 공사를 하기 위한 자재를 표지석 바로 앞에 놔두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평지도 아니고 가파른 언덕을 올라갔다 다시 내려온 사람들은 각자 자기 나라 언어로 욕하기 시작했다. 나도 한마디 거들까, 생각했지만 한 번 더 찾아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따라간 내 실수도 있었기에 참았다. 욕을 해봐야 한국말을 알아듣는 건 나뿐일 테고, 다시 내 귀로 돌아 들어올 뿐이었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걸어가려는 데 철길을 넘어오는 수많은 학생무리가 보였다. 누군가 내게 사리아부터는 순례길도 정체가 일어날 때가 있다고 귀띔해 주었는데 이런 걸 두고 한 말이었다.
한참 동안 수많은 스페인 학생에게 둘러싸여 걸었다. 자꾸 한국인이냐고 묻는 그들에게 BTS와 블랙핑크를 좋아한다는 제스처를 하는 것도 지쳐갈 때쯤, 휴대전화에 메시지가 왔다. 폰페라다의 알베르게 호스트였다.
‘괜찮다. 힘든 순례길을 걷고 있을 테니 신경 쓰지 마라. 너에게 그 카드가 기념이 되길 바란다.’
솔직히 난 호텔 객실키를 분실하면 얼마 정도를 지불해야 하는지 한국을 기준으로 검색을 해보고 있었다. 이런 나를 순식간에 창피하게 만드는 메시지였지만, 또다시 받은 호의에 감사함을 전했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길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있는 Bar로 발걸음을 옮겼다. 탄산음료가 먹고 싶었다. 음료가 가득 담긴 컵을 들고 바깥에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잘 보이는 곳이었다. 폰페라다에서 같이 저녁을 먹었던 한국인 친구가 나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를 하며 앞에 앉았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데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한 아이를 혼내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한국인 친구는 그녀를 계속 봤는데 오전 내내 아이를 혼내고 있었고,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혼날 짓을 하고 있었다고 말해줬다.
오늘은 100km 표지석이 나타나는 날이었다. 생장에서부터 걸었던 사람들에게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 나게 하는 장소였다. 표지석 앞은 이미 많은 사람이 기념사진을 남기기 위해 서 있었다. 700km를 걸어왔다는 대견함보다 100km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마음을 설레게 했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걷고 있는데 아까 엄마에게 혼이 나던 아이가 보였다. 그런데 엄마는 보이지 않고 학생으로 보이는 형, 누나와 있었다. 엄마가 결국 포기하고 따로 걷고 있다고 생각했다.
점심 무렵이 됐다. 마침, 식당 하나가 보였다. 이곳은 닭튀김 요리가 있었다. 대부분 스페인에서는 굽거나 삶은 것뿐이었는데 반가웠다. 난 닭튀김과 맥주를 주문했다. 음식을 기다리며 마당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있는데 아까 그 아이 혼자 식당으로 와 앉았다. 같이 있던 형과 누나는 보이지 않았다. 이상했지만 참견할 일이 아니었다. 그때 지나가던 아주머니 무리가 아이에게 다가왔다.
“너 이름이 뭐니?”
“네가 사비니?”
“너 엄마 어디 있는지 아니?”
질문이 쏟아졌다.
이번엔 나에게 음식을 가져다준 주인장 아주머니가 그 아이에게 가더니 이야기를 나눴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저 아이가 엄마와 떨어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순례자 아주머니와 주인장은 이야기를 나누더니 어디론가 전화했다. 아이를 잃어버렸다며 전 마을 식당에서 도움을 요청하고 있던 엄마를 본 이분들이 마침 비슷해 보이는 아이가 있어 이름을 물었던 것이었다. 주인장은 엄마가 있다는 식당에 전화를 걸어 아이의 엄마와 통화를 했고, 아이가 여기 있다고 알려주었다. 아이가 줄곧 혼나며 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나 역시 아이를 잃어버린 경험이 있었기에 그 엄마의 마음이 어떨지 잘 알 수 있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고통도 내 아이를 잃었을 때보다 더 하지 않았다. 모든 시간이 멈춘 것 같고, 판단이 서지 않는다. 내 일부분이 떨어져 나간 게 아니라 전부가 떨어져 나간 듯한 고통이었다. 다행히 해프닝으로 끝났던 사건이었지만(브런치 북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그 순간이 잊히지 않는다. 식당 주인장은 배고프다는 아이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다. 엄마의 숨 막히는 고통을 알 턱이 없는 저 아이도 언젠가는 철이 들겠지.
작은 소동을 뒤로한 채 포르토마린으로 향했다. 며칠 만에 햇살이, 따가울 정도로 강렬하게 내리쬈다. 점퍼를 껴입어도 추운 날씨와, 반팔 티셔츠만을 입어야 겨우 견딜만한 더위가 반복되는 날씨 탓에 감기 환자들이 속출했다. 그동안 체력이 많이 떨어져 있어서 더 그런 것 같았다. 마지막까지 건강하게 완주해야 한다는 부담은 있었지만, 워낙 감기와는 거리가 먼 나였기에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라 조금만 추위를 느끼면 바로 점퍼를 꺼내 입었다.
스페인에 온 후로 처음 보는 커다란 강이었다. 마치 호수처럼 잔잔한 강 위에는 좁고 긴 다리 하나가 있었다. 인도가 너무 좁아 마주 오는 사람과 부딪히지 않고는 지나갈 수가 없었다. 다행히 걸어서 다리를 건너는 사람은 순례자뿐이었고 방향은 모두 포르토마린을 향하고 있었다. 다리의 끝에는 높은 계단이 마지막 관문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 포르토마린은 스페인 사람들에게도 휴양지였다. 한국의 양평이나 청평과 느낌이 흡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