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토마린 - 파라스 데 레이 24.8km
고개를 살짝 돌려 바라본 창밖의 하늘은 아직 어둑했지만, 잔뜩 흐려 보였다. 침대에서 일어나 소리 나지 않게 살며시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새벽공기가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다행히 비가 오지는 않았다. 어둠 가운데서 더듬더듬 내 짐을 하나씩 찾아내 집어 들고 현관 옆에 있던 식당으로 내려왔다. 어제 미리 사둔 계란과 바게트를 냉장고에서 꺼내 들었다. 아침은 계란프라이와 버터, 그리고 딸기잼을 바른 바게트였다.
강으로 내려가는 언덕에는 이미 대형 버스 여려 대가 수학여행 온 학생들을 태우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다리 하나를 건너니 또다시 두 갈래로 갈라지는 표지석이 나타났다. 순례길의 막바지로 갈수록 이런 식의 ‘보완 루트’가 종종 등장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선택하는 방향으로 나도 걷기 시작했다. 기온이 낮아 옷을 껴입고 출발했는데, 시작부터 꽤 긴 오르막을 만났다. 결국 하나씩 벗기 시작해 반팔 티셔츠만 입은 채 걸었다.
‘머피의 법칙’. 더워서 옷을 벗으니 다시 기온이 내려가고 바람마저 불기 시작했다. 춥다고 느낄 때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변덕스러운 날씨 탓에 입었다 벗기를 반복했다. 중간중간 쉼터만 나오면 여지없이 단체 학생들을 만났다. 이들은 빠른 속도와 수다를 장착한 채 걸었다.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고등학생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학생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는 남학생과 친구의 뒤통수를 한 대 치고는 열심히 도망가는 모습들. 영락없다.
Bar의 입구에는 갈라시아 소고기 패티가 일품이라고 적힌 수제버거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홀린 듯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순례자 손님이 많지 않았다. 서둘러 수제버거를 주문하고 마당이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난 현관을 등지고 앉았다. 먹는 동안 현관으로 들어오는 사람과 계속 눈맞춤하는 것도 부담이고, 아는 사람이라도 오면 인사하랴 맛에 관해 설명하랴. 생각만 해도 귀찮았다. 난 먹는 데 집중하고 싶었다.
내가 앉은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구석진 자리에는 프랑스에서 온 여자 순례자가 나보다 먼저 수제버거를 받아 들고 나이프로 조심스레 자르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수제버거집에 가면 나이프와 포크를 주는데, 난 그것이 불편했다. 버거는 들고 먹어야 제맛이지. 식당을 두리번거리다가 내 시선은 다시 그녀에게 머물렀다. 옛날 한 프랑스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녀는 우아하게 수제버거를 먹고 있었다.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식당의 테라스에 앉아 스테이크를 썰어 먹는 듯한 모습으로, 단지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해 정말 깔끔하게 버거를 먹고 있었다.
내 앞에 놓인 수제버거 가까이 코를 가져다 댔다. 소고기의 육향이 아주 진했다. 그리고 특이하게 빵의 윗부분에 동그랗게 구멍을 내고 그 안에 반숙으로 된 계란프라이의 노른자가 보이도록 했다. 향도 모양도 맘에 들었다. 재료들이 도망가지 않도록 두 손으로 단단히 붙잡고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맛이 기가 막혔다. 노른자가 터지면서 소고기의 육즙과 어우러져 너무 고소했다. 야채와 치즈의 풍미가 소고기를 씹는 동안 더해져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유레카!
한바탕 전쟁을 치른 듯한 내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버거에서 탈출한 양상추 하나를 집어 들고 마저 입에 넣었다. 방식은 달랐지만, 나 역시 남김없이 깔끔하게 먹었다. 계산하고 나가야 하는데 주문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이렇게 줄을 길게 늘어선 것을 본 것도 처음이었다. 돈을 내기 위해 나도 저 줄에 서야 하는지 궁금했다. 혼자 주문을 받느라 정신없는 주인장 옆에 다가가 제발 한 번만 쳐다봐 주길 바라며 조용히 서 있었다.
“Cuenta(꾸엔따-계산)”. 드디어 나를 본 주인장이 주방 쪽을 향해 뭐라고 소리치니 요리를 하다 말고 부인이 나와서 도와주셨다. 두 사람이 감당하기엔 손님이 너무 많아 보였다. 난 휴대전화 번역기로 ‘스페인에서 먹어본 수제버거 중에 가장 맛있었습니다.’라고 적어 주인장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내 눈을 뚫어져라 보더니 주문하던 사람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더니 테이블 아래에서 조그마한 항아리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아주 진한 포도 향이 나는 액체였다. 그는 나에게 한 번에 털어 넣으라고 손짓했다. 이게 정확히 뭔지 몰랐지만, 옛날 시골집 찬장 깊숙이 숨겨놨다가 꺼내 놓은 꿀단지 같은 귀한 느낌의 그 액체를 난 단숨에 삼켰다. 시큼했다. 뒤이어 올라오는 묵직한 포도 향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술인가? 목구멍을 지나 뱃속까지 타는듯한 느낌이 올라왔다. 그는 나의 표정을 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에게 아주 좋은 와인 원액이라고 설명하며 엄지를 치켜세워 보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이 나에게 한마디 했다. “너 방금 와인 한 병 마신 거랑 똑같아”
덕분에 나는 한동안 추운 것도 모르고 기분이 아주 좋은 상태였다. 오늘은 언덕을 한두 개 넘은 것을 제외하면 비교적 걷기에 수월한 길이었다. 고즈넉한 분위기에 혼자 사색을 즐기며 걸을 수는 없었지만, 길에서 만나는 어린 학생들의 활기차고 밝은 모습이 나에게도 힘이 되어 주었다. 일찍 출발한 덕분에 ‘파라스 데 레이’에 꽤 일찍 도착했다. 호스트는 나에게 위와 아래 중 어디를 원하냐고 물어봤다. 난 당연히 아래라고 말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침대의 위아래를 물어본 게 아니고 0층과 1층 중에 원하는 층을 물어본 것이었다. 1층에는 단체로 온 학생들이 있었다. 잘 못 알아들어서 천만다행이었다.
PS. 유럽은 대부분 0층이 존재한다. 처음 파리의 호텔에서 난 2층에 방이 있었다. 밖으로 나가려고 방을 나서면서, 한 층만 걸어 내려가면 되니까 굳이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내가 예상한 장소가 아니었다. 처음 간 호텔이라 내가 구조를 잘못 이해한 줄 알았다. 복도를 이리저리 둘러봤지만, 도무지 나가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난 할 수 없이 다시 올라가 엘리베이터를 타고서야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0층? 아, 로비는 0층이구나.’
유럽에서 그곳에 사는 사람과 1층에서 만나자고 하면 어리둥절해할 것이다.
‘응? 거기서 왜?’
Tip. ‘사리아’부터는 순례자가 급격히 증가한다. 평소보다 일찍 출발하길 권한다. 그나마 덜 복잡한 길을 걸을 수 있고, Bar에 들러도 기다리는 시간이 줄어든다. 알베르게에 도착해서도 씻거나 세탁을 하려고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