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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rene Nov 22. 2021

오해받는 것-그래서 억울해지는 것

아들이 이번에는 “나 자살할 거야”라는 문구를  SNS에 올려 담임선생님의 전화를 받게 됐다.

아들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A라는 아이에게 연락이 왔는데 자신이 무슨 이벤트에 당첨됐다며 SNS에 "나 자살할 거야"라고 글을 올리지 않으면 소원 세 개를 들어줘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지금 그 글을 보고 학교에서 난리가 났어! 장난이라도 해야 할 말,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그렇게 구분 못하겠니?”

“이게 그렇게 큰일인지 몰랐어요.”

“지난주에도 A가 핸드폰 뺏어가서  폰으로 다른 친구에게 욕을 써서 네가 뒤집어쓰고 곤란해졌었잖아. 친구가 달라면 주고 쓰라면 쓰고 대체 언제까지 친구들이 하라는 대로 할 거야?”

“그럼 어떡해요. 저렇게 안 쓰면 소원을 세 개나 들어줘야 하는데.. 원래는 '나 자살할 거야'랑 '나 이민 가'둘 중에 하나를 올리라고 했는데 하필 두 개 중에 딱 '나 이민 가'가 있는 거예요. 근데 엄마가 아직 친구들한테 이민 가는 거 얘기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나 이민 가'는 고를 수가 없어서 '자살할 거야'를 고른 거예요."


이민 가는 것이 아직 비밀이기에 자살을 골랐다는 아이의 말에 나를 불태우던 화는 슬픔으로 바뀌었다. 살얼음판 위를 걷 듯 조마조마하고 위태운 세상에서 느린 아들이 어찌 살아남을지 걱정이 된다.


매번 아이에게 일어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나에게 지인이 물었다.

뭐가 그렇게 두려운 것인지..


"아이가 오해받는 것-그래서 억울해지는 거요."


지인은 아이도 자신이 안 했다는 것을 알아 떳떳하고, 나도 엄마로서 아이를 믿고 있고, 신도 진실을 알고 있는데 외부의 요건들을 해결하는데 에너지를 소모하기보다 나와 아이의 관계를 더 돈독히 하는데 애쓰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조언을 건넸다.

아이가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아이보다 내가 더 괴로운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나의 문제일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의 문제’라는 말에 반박할 수 없어 할 말을 잃었다. 지인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지만 나는 ‘나의 문제’라는 말에 사로잡혀 제자리를 맴도느라 다른 말은 들리지도, 집중하기도 힘들었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전학을 가게 되었는데 단지 전학생이라는 이유로 첫날부터 왕따를 당하게 됐다. 내가 무엇을 한 것도 아닌데, 차라리 그러기라도 했다면!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한 상황에서 당하는 왕따는 어린 내가 겪어내기에는 너무나 버겁고 힘겨웠다. 점심시간이 되면 내가 자신들의 무리에 끼지 못하게 다닥다닥 붙어 앉아 도시락을 혼자 먹었고, 내 신발에 물을 부어 놓거나 숨겨서 맨발로 집에 가야 했고, 내 몸에 돌을 던져서 맞추 놀이를 피해 달려야 했고,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하면서 뒷산으로 불러내어 무릎 꿇리기도 했다. 그 시절 선생님은 반장, 부반장에게 시험을 채점하게 하기도 했었는데 내 시험지의 이름이 다른 아이와 바뀌어 있기도 했었다.


억울한 누명에 대해 어떠한 반응도, 호소도, 해명도 하지 못하고 집어삼킨 기억들이, 지금은 다 잊었다고 생각하는 그 기억들이 내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아직 소화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의 문제'라고 인식한 순간부터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돼버렸다. 어쩌면 나는 나를 괴롭힌 아이들을 용서하지 못한 게 아니라 그때 아무 대처도 하지 못한 나를 용서하지 못한 지도 모르겠다.


삶을 살아내면서 느끼는 건 내가 나의 문제든, 아이의 문제든 오해를 풀려고 하면 할수록 상대는 자신이 오해하고 있는 확신을 더욱 공고히 하려 고 나는 구차하고 비겁한 변명자로 전락다는 것이다. 렇다면 진실을 밝히려는 집착에서 벗어나야 할까. 그렇게 되면 억울함을 해소하지 못한 불편감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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