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결혼 이야기
여자는 한 해를 며칠 앞 둔 어느 날 새 달력을 꺼내 들었다. 내년에는 쉬는 날이 좀 많나? 남편이 달력을 보고 있는 여자를 보며 말을 꺼냈다. 안타깝게도 별로 없는 거 같은데... 내년에도 우리 쉬지 말고 일만하라는 계시야. 아휴, 또? 설이나 빨리 왔으면 좋겠다. 여자는 해마다 새 달력을 꺼내 들면 제일 먼저 시아버지와 시어머니의 생일 날짜를 체크했다. 음력날짜를 남편에게 확인해가며 혹시나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달력에 크게 써두는 것이다. 음력으로 몇 월 며칠이니깐 이날이 맞지? 아버님 생신이 말이야? 그리고 우리 남편 생일이 어디보자... 그러면 남편은 얼른 여자에게서 달력을 뺏어서는 여자의 생일과 결혼기념일에 크게 하트를 그려주었다.
사실 여자가 시부모님의 생일을 기억해야 하는 의무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남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나 이렇게 시부모님을 생각하는 착한 며느리야 ... 라고.
남편은 자신을 낳아준 엄마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여자가 마음을 연 타인이었다. 내내 외롭고 힘든 여자의 인생에 어느 날 불쑥 들어와 그는 따듯한 손을 내밀어 주었다. 재미없을 텐데... 지루 할 텐데... 라고 말해도 번번이 여자가 가는 곳 어디든 따라 가겠다고 했다. 기껏 여자가 가는 데라고는 동네 뒷산이나, 강변 산책길 그리고 도서관이 전부였지만, 남자는 함께 걷고, 여자가 책을 고르는 동안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이미 혼자인 것에 익숙했던 여자는 처음에는 불편했다. 불편해. 뭐가? 부담스럽단 말이야. 응? 누가 나랑 같이 다니거나, 날 기다리고 있는 거 말이야. 그게 왜 불편해? 너도 재미없잖아. 지루해 할 것 같아서 눈치 보인단 말이야. 눈치 보여서 걸음도 빨리 걷게 되고, 책도 대충 고르게 된다고. 내 일에 집중 할 수가 없단 말이야. 아니야, 난 재밌어. 그러니깐 천천히 해.
남자와 함께 다니는 것이 익숙해 질 때 쯤 여자에게는 새로운 두려움이 밀려왔다. 어느 날 갑자기 다시 혼자가 되어 이 길을 걷게 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외로움은 혼자일 때 드는 감정이 아닌 것 같았다. 그것은 둘이였다가 혼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느껴지는 감정일지도 모른다. 지난 시간 여자가 담담하게 살 수 있었던 건 마음을 닫고, 희망을 버리고, 혼자만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런 여자에게 다가오는 남자의 존재는 희망보다 더 큰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남편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남편에게 잘하고 싶었다. 여자에게 손을 내밀어준 고마움과 남편을 잃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이 뒤섞여 여자는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시부모님한테도 잘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들 그래야 한다니까 그런 줄 알기도 했지만, 그것이 남편에게 잘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감정 속에 빠져 너무 잘 할려고 만 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여자의 마음이 시부모님의 눈에는 당연한 며느리의 도리로 보였던 걸까. 점점 더 바라는 것이 많아지는 시부모님이 힘겨워 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자는 조금씩 억울한 마음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여자는 결혼을 한 후부터 일 년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경험을 했다. 시댁과 친정에 챙겨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일에 메여있는 딸을 안타깝게 여긴 친정엄마는 웬만한 건 다 넘어가자고 했지만, 시댁은 상황이 달랐다. 아이고, 난 또 누구시라고. 얼굴 다 까먹겠다. 자주 좀 오너라... 볼 때 마다 여자에게 빈정거리는 시아버지. 난 또 안 올 줄 알았지, 올 수 있으면 오고 아니면 말아라... 언제나 냉랭하고 차가운 시어머니. 여자가 얼굴을 아무리 내밀어도 시댁에서 여자는 ‘안 오는 사람’이거나 ‘올 줄 몰랐던 사람’이 되었다. 그렇게 시댁 일들에 얼굴을 내밀다 보면 시간은 금세 지나가 버렸다.
왜 그렇게 나를 보고 싶어 하시는 걸까? 우리 엄마, 아빠가 여보 좋아 하잖아. 해맑게 웃고 있는 남편의 모습에 한 점 의심이라고는 묻어 있지 않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 하는 거야? 응, 하고 헤헤 웃는 남편은 어디를 보아도 미운데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여자에게 남편은 남자와 여자를 떠나 항상 함께 하고픈 좋은 친구였다. 하지만 여자의 마음과 달리 세상에는 그들에게 정해진 역할이라는 것이 있었다. 아내와 남편, 아들과 며느리로서 말이다.
내가 여자라서 밥하고 있는 게 아니야. 여보가 요리를 못하니깐 내가 하는 거지. 우리 엄마는 여자가 음식을 할 줄 알아야 한다면서 도마질 하는 거부터 배우라고 만날 잔소리 하셨거든. 그때는 엄마가 혼자 하기 힘드시니까 나를 조수로 쓸려고 그런다고 생각했는데, 나와서 혼자 살아보니까 정말 유용하더라고. 나는 어릴 때부터 집안일을 했으니까 웬만큼은 다 할 수 있는데 여보는 하나도 안 해 봤나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집안일을 같이 하려고 하니깐 더 대단 한 건가. 어쨌든 너무 고마운 것 사실이야. 그런데 빨래도 널어 놓은 거 보면 완전 쭈글쭈글해서 입을 때 진짜 난감하기는 하더라. 누군가를 위해서 집안일을 하는 게 아니라 최소한 나 자신을 먹이고, 내 삶을 잘 꾸려 나가기 위해서 집안일은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집안일을 하는 데 남녀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시간이 되고 먼저 맞닥뜨린 사람이 그냥 하면 되는 거지. 나는 결혼하고 이 사실을 깨달았어... 요즘 같은 세상에 분업은 큰 의미가 없어. 세상은 이미 많은 부분에서 분업이 이루어지고 있잖아. 혼자 살아도 전혀 불편하지 않을만큼. 그래서 말인데...
나 이제 아버님, 어머님 생일이나 명절에만 시댁에 갈래. 아, 어버이날 이하고 뭐 큰 일 있을 때 그 때만. 응? 여보는 어떻게 생각해? 음... 나는 괜찮은데... 나는 진짜 괜찮아. 그런데 엄마, 아빠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네... 아니면 내가 한 번 물어볼까? 뭐라고 물어 볼 건데? 이제 며느리가 시댁에 중요한 일 있을 때 빼고는 안와도 되냐고 물어 볼 거야? 남편은 잠시 먼 곳을 보며 고민해 보더니 ‘응’ 하고 대답했다. 여자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뭔가 아버님 어머님께서 굉장히 기분 나쁘실 것 같아. 화내시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런가? 게다가 시댁에서 여보 말 빨은 최악이잖아. 서열도 제일 꼴찌고 말이야. 괜히 우리 둘 다 크게 혼날 수도 있어. 그냥 내가 친정에 하듯이 며느리가 많이 피곤해해서 쉬라고 했다고 하면 안 돼? 나도 친정가면 *서방은 많이 피곤해서 쉬라고 했다 그러거든. 하지만 여자는 알고 있었다. 남편은 절대 시댁에 가서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막상 시댁에 가야 할 일이 생기면 남편은 언제 그랬냐는 얼굴이 될 것이다. 그래도 여자에게 강요 하지 않고, 언제나 여자를 이해할 수 있다는 남편의 말은 큰 힘이 되었다.
그런데 왜 며느리는 시부모님한테 잘해야 하는 거야? 여보는 생각해 본 적 있어? 음... 글쎄... 나도 우리 부모님이 그런 거 신경 쓰는 분들인 줄 진짜 몰랐어. 그냥 편하게 해 주실 줄 알았는데 말이야. 지금 막 생각 난건데... 응? 시부모님 덕보고 살아서 그런 게 아닐까? 누구누구는 시부모님이 결혼할 때 사주신 아파트가 지금 30억이 넘었데. 요즘 집값이 오르니깐 그런 얘기 많이 듣잖아. 그렇지? 그럼 당연히 시부모님께 잘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부모 자식 간에 꼭 돈을 주셔서 그런 게 아니라……. 여보는 월급 받지만, 나는 손님들 주머니에서 만원 한 장 나오기가 얼마나 힘든지 매일매일 경험하니깐 그런 생각이드네. 여자는 자신의 노동과 정성이 실시간 돈으로 바뀌는 경험에 익숙해진 사람이었다. 그런 걸 생각하면 감사하잖아. 나는 손님이 30만원만 줘도 무릎으로 걸어 다녀. 푸하하. 응, 여보 얘기를 들으니깐 그럴 수도 있겠네. 아무래도 지금까지는 며느리들이 시부모님이나 남편한테 경제적으로 많이 의지하고 살았던 건 사실이니까.
그런데 나는 아버님, 어머님께서 나를 마음으로 대해 주시길 바랬어. 왜, 옛날에 엄마가 아침 일찍 교복입고 지나가는 학생만 봐도 내 자식 같아서 안쓰럽더라고 하신 적 있거든. 그런 마음 말이야. 내가 여보를 마음으로 생각하니깐 일하러 가는 것도 안쓰럽고 일하고 오는 것도 다 안쓰럽게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나도 봐 주실 줄 알았거든. 그런데 몇 년이 지나보니깐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어. 나도 요즘 말로 딱 할 도리만 하고 그만 할래. 그래도 괜찮아? 그래... 이런 생각하기까지 너무 무서웠거든. 어머님, 아버님은 말 할 것도 없고, 형님들이 단체로 내 머리라도 쥐어 뜯으면 어쩌나 걱정 할 정도였다니깐. 에이, 설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렇게 말도 안 될 정도로 무서웠다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자는 남편의 마음이 두려웠다. 제 부모한테 자식 도리 안하겠다는 부인을 어느 남자가 좋다 하겠냐...는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여자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지만, 가장 무서운 것은 여자를 미워하게 될지도 모르는 남편의 마음이었다. 행복하게 살자! 며 서로의 양손바닥을 탁탁 치고 즐거워 할 때 시부모님은 정말 생각해 보지 못한 부분이었다. 여자도 시부모님을 뵐 때마다 이분들의 아들이어서 우리 남편은 크는 동안 행복했겠구나 생각했었다. 자식들을 대할 때나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그 분들은 너무 좋은 분들이었다. 하지만 며느리에게는 달랐다. 그마만큼 시부모님과 며느리 사이에 고착되어 온 역할은 견고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여자가 먼저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부모님께 그저 잘 보이고만 싶었던 마음을 여자 스스로 내려 놓기로 했다. 여보, 나 미워하려면 미워해도 돼.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감히 여보를 낳아주신 부모님과 경쟁 할 생각은 나도 없어. 무슨 소리야? 미워 하긴 왜 미워 해. 결국은 그렇게 될 거야. 다 그렇게 된다고 그랬어. 황당한 얼굴이 되어 자신을 바라보는 남편을 보자 여자는 자신의 감정이 또 급격하게 달려 나간 것을 깨달았다. 아니, 부모님이 불편해 하시면 결국 여보도 불편 할 거고, 그러면 우리 사이도 불편 해 지잖아.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또 나만 참으면 되지... 하고 생각하다가 나도 갑자기 억울해지고... 그럼 뭐 다 불편해 지는 거 아니겠어? 아니야, 그렇게 또 나중 일까지 생각할 거 없어. 지금은 일단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어. 여보 편할 대로 해. 그래도 돼.
하지만 결국, 나는 여보랑 이혼하기 싫다고... 하고 울음을 터트린 여자는 자신의 이 경계 없이 휘몰아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또 다시 좌절하고 말았다.
남편의 사랑만큼 자기 자신도 중요하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물론, 자신의 소중함을 깨우쳐 준 것 역시 남편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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