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하게 빛나는 깡통도 보석이라면 믿을까 1

더럽게도 암울한 어린 시절

by 한숨

공부를 잘하지 못했다. 사춘기가 와서 한번 놓치게 되니 기초가 부족하고 어느 순간부턴지 좋아하지 않았다.

미대 입시를 하다가 원하던 학교 입학에 실패하고 직장을 먼저 알아봤다.


20대 초반의 나는 어느 제약회사 영업팀 사무보조로 입사하였는데,

공주님들이 가득한 외국계 제약회사였다. 약사와 간호사로 이루어진 영업팀에 고졸인 나는 그저 한낱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를 창고의 먼지 속에서 서류를 찾아야 했고 a-z까지 정리해 라벨을 만들어 붙이고 엑셀로 문서화 한 뒤 검사를 받아야 했다.

의사와의 로맨스를 꿈꾸는 가방끈이 길고 고상한 그들에게 머슴 같은 아르바이트생인 나는, 당연히 같이 점심밥도 안 먹어주는 이른바 은근한 직장 괴롭힘을 당했다.


오래 다니진 못했지만 그래도 꽤나 긍정적이었다.

푼돈의 월급에 예쁜 정장을 입지 않는다며 잔소리를 하고 직장의 물을 흐린다고 대놓고 욕을 먹을지언정 나는 첫 직장이 신기했고 즐거웠다.


우리 집은 역마살인지 특이하게도 이사를 정말 많이 했는데, 내가 태어난 이후에서 20대까지만 약 13번 정도 이사를 다녔다.


그 당시 우리 집은 엄마가 뇌종양의 우연한 발견으로 급한 수술을 하고 요양 중이었고 아빠는 사업에 실패해 개인파산상태로 봉천동의 중국인이 많이 사는 동네 위쪽 어느 주택에 딸린 반지하 월세집에 옹기종기 살았다.

구두를 신으면 두어 번 만에 굽이 다 박살이 날 만한 아스팔트 오르막길 끝에 우리 집이 있었고, 담벼락과 집 건물 사잇길로 돌아 들어가면 우리 집 온 가족 신발이 문밖에 줄줄이 나와있었다.

문을 열면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가는 길에 싱크대가 작게 옆으로 붙어있었고 오른쪽엔 내방, 안쪽에는 화장실과 안방이 있었다.

내방은 컨테이너를 덧대어 만든 방으로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웠고, 비가 오면 전화통화소리가 안 들릴 정도로 빗소리가 망치소리처럼 들렸다.


그리고 바로 우리 동네에 유명한 부녀자 살인 사건이 났고, 밤길을 조심하라 했으나 인적 드문 골목을 지나지 않으면 어디에도 갈 수가 없었다.


어느 날은 살짝 보였지만 식칼을 잠바 옷 속에 넣고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남자를 본 날도 있었다.


순간 뒤로 돌아 뛸까 많은 생각을 했지만

이미 그러기엔 너무 가까웠고 눈이 마주친 것만 같아서 재빨리 휴대폰을 들고

"어~아빠 어디라고? 안 보이는데? 아!! 나 다 왔어. "

하면서 손을 흔들며 뛰어갔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겁 없는 20대였는데

우리 엄마는 아직도 내가 헛걸 본거라고 한다.

우리 엄마는 대부분의 내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 집엔 오빠가 있을만한 방이 없어 오빠는 집에 잘 오지 않았다. 마침 오빠는 강원도에서 학교를 다니고 기숙사 생활을 하다가 군대를 다녀왔던 시기였다.


나는 당시 우리 집이 창피했기 때문에 누군가 바래다주는 것을 극도로 꺼렸는데, 한 번은 회사에서 워크숍 후 직원분이 데려다준다고 해서 당혹스러운 기억이 있다.

애써 버스가 다니던 큰길에서 내려달라고 부득부득 우겨 집까지 걸어간 적도 있었다.

그 골목은 길이 좁고 이중 주차 때문에 차를 돌리기도 어려워, 택시들도 그 골목은 안 들어가 주었으니 차라리 그게 나으리라 생각했다.


계약기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주인집 측에서 나가주길 바랬다.

부모님은 둘 다 파산하셨고, 내가 벌어오는 알바 수준의 사무보조 일로는 당연히 서울 어디에도 방한칸도 힘든 수준인데,

엄마가 불편한 몸을 끌고 들어 본 적도 없는 동네로 이사를 알아보러 다녀야 할 위기에 놓였고, 나는 서울을 떠나기 싫었다.

운 좋게도 며칠 뒤에 내가 인터넷으로 며칠 동안 폭풍 검색하여 찾아낸 재개발 직전의 아파트에 전세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믿기 힘들게도 그곳은 강남이었다.

대신 재개발이 시작되면 언제든지 나가는 조건으로, 우리 가족은 강남권 가족이 되었다.


내가 중학생 때 갈 수 있는 학교는 극단적이었다.

뺑뺑이로 복불복의 학교를 가는데 일부 학교는 학생들 질이 좋지 않다는 소문이 있었다.

엄마의 기지로 교회 지인분 집 주소로 바꿔 강남에 유명 8 학군 고등학교를 가게 되었고 내 친구들은 전부 강남에 사는 부잣집 딸들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게 좋은 일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많은 친구가 있는 편은 아니었지만 학창 시절에도 아빠가 사업에 실패해 500원짜리 빵을 사 먹고 학원비를 내지 못해 고3 입시 직전 미술학원에서도 쫓겨나던 강남 극빈민 학생이었다.

어쩌면 강남에 사는 그들을 보며 어떻게 서든 엉덩이를 비벼대며 강남에서 멀어지지 않고 싶었나 보다.


아무튼 새로 살게 된 그 집은, 강남은 쓰러져가는 아파트라도 강남이라고, 동네가 아주 쾌적하고 산책로 등이 좋았다.

우리 집은 양재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타워팰리스가 보이는 개포동이었다.

지금은 멋진 아파트가 새로 생겼지만, 그전에 아파트는 꼽등이가 밤에 까맣게 깔리고 쓰레기를 말 그대로 몇 층높이의 산처럼 쌓아버리는 내 나이보다도 오래된 아파트였다.

딱 나처럼.

강남 빈민촌 같은 을씨년스러운 아파트였다.


그래도 나름 교통의 요지라 고속도로도 가깝고 버스만 타면 어디든 갈 수 있는 점. 취업이 용이했던 점이 좋았는데, 고졸의 사무보조만 하는 내가 뭘 하겠나.. 비슷한 일만 구했다.

100만 원 정도가 나의 월급이고 당시에는 사무보조는 24살 미만으로만 뽑았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고졸은 더 이상 뽑는 곳이 없었다. 우리나라는 돈만 주면 대학을 갈 수 있는 나라라며....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가는 기분에 고졸의 벽을 느끼고 전문학교를 알아보았다.

학교생활을 다시 잘할 수 있을지 확신은 없었지만 공부는 잘해서 장학금을 받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그렇게 25살에 학교를 가기 위해 서울에서 대전으로 혼자 유배 같은 유학을 가게 된다.


학교를 늦게 들어가고, 장학금을 전부 타며 생활비도 벌었지만 우리 집에는 나에게 보내줄 돈뿐 아니고 부모님이 생활할 돈도 없었기에 학자금 대출에서 생활비 대출을 계속 받아쓰게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알았지만 별 대단하지 않은 학교에서 별 대단하지 않은 학과의 학점관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서류에서 조차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니까.


2년제를 졸업하고 서울로 왔을 때는 집이 다시 이사를 했다.

쓰러져가는 아파트지만 강남에서 살았다는 가산점으로 강남에 근사한 임대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새 아파트는 내 인생에서 처음인지라 우리 가족이 부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집은 새집이지만 우리 집은 아직도 가난했고 뭘 해도 돈에 찌든 삶은 정말이지 신물이 날 만큼 지겹고 지쳐갔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 듯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새집마저도 오래가지 못하고 아버지의 또 다른 도전인 부동산 경매업 때문에 아빠 명의로 된 상가가 생기자 우리는 다시 쫓겨나게 된다. (물론 그 상가로 인한 수익은 하나도 없어 집만 쫓겨난 듯한 느낌이었다)


아빠는 별안간 인천으로 이사 간다는 소식을 전했다. 얼마 다니지 못했지만 또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기다렸다.

연고도 없는 바닷가로 가는 게 나는 너무 싫었다. 어릴 때 지겹도록 해왔기 때문에 새로운 곳에 적응하기도 싫었다.


이것도 나의 염원이 통했던 걸까, 이삿짐 업체까지 예약한 마당에 그 집에 경매가 엎어져서 이사가 취소되었다고 하였다.


당장 나가야 하는 상황이라 급하게 나까지 투입되어 이사 갈 집을 알아보게 되었다.


무료 경매 사이트에 들어가 경기도 전체를 검색해서 비교하고 골랐다.

돈은 없지만 우리는 까다로웠다.

그게 바로 지금의 집 용인이다. 경기 북부나 인천 쪽은 싫었고 그나마 강남에서 가까운 지역 중에 금액이 맞는 곳으로 구하게 된 곳. 방이 4개일 것.


경매로 집을 구하는 건 처음이었는데,

일단 돈이 부족해도 대출이 된다는 점이 좋았다.

엄마와 내가 직접 경매장에 갔다.

전 날 아빠가 정해준 범위 안에서 내가 적은 금액을 가지고.

그렇게 순식간이었지만 우리는 집을 갖게 되었다. 물론 대출이 다 했지만..

그래도 방 4개에 큰 집으로 우리는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작은 삼촌집으로 모셔야만 했던 할아버지를 다시 모실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 오빠도 방이 생겼다.


우리 가족의 집은 10대에 잃고 20대가 지나 30대가 다 되어서 다시 생기게 되었다.

아직은 은행 소유일 지라도..!!


나는 지금까지도 늘 남들보다 뒤처진 느낌이 드는데 그간 늘 아등바등 뒷 꽁무니만 따라다닌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짧고 보잘것없는 알바와 직장생활에 중간에 학교를 다니고 또 임시로 회사를 다니는 나이 많은 신입사원이 되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