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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석 Sep 02. 2022

빈나무(미완)

22년 9월 2일

 여느 시골이 그러하듯 제주도의 곳곳에는 사람의 발길이 뜸해 식물이 무성히 자란 장소가 많다. 누군가의 소유임을 표시하는 것으로 보이는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사람 키만치 자란 들풀과 손길이 닿은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나무들이 그곳을 마냥 자연처럼 보이게 한다. 근교의  땅에 비쩍 마른 나무들을 대충이라도 심어두는 그런 한 끗의 정성도 없다. 새로 포장하는 도로의 옆에도, 버스정류장 옆에도, 누군가의  옆에도 그런 곳들이 있다.


 사실 나무는 주인을 잃은 듯한 그런 땅에 뿐 아니라 어디에나 있다. 서울의 가로에 있는 소나무나 은행나무처럼 반듯하고 정갈하고 곧게 뻗은 나무가 아니라, 다른 존재들의 풍파까지 제가 껴안은 것처럼 이리저리 뒤틀리고 영양분을 찾아 이리저리 뒤틀려 땅을 뚫고 나온 뿌리와 햇빛을 찾아 사방으로 너저분하게 뻗은 가지를 가진 그런 나무이다. 몸통에는 덩굴을 발밑에는 작은 나무와 풀들을 머리에는 썩고 새로이 만들어지는 둥지들을 짊어진 그런 나무다. 생명의 온상처럼 보이는 나무들은 어느 공터의 끝자락에, 아님 부지가 만나는 모서리에 뜬금없이 있기도 하고, 마을의 소중한 나무로 가로 한 구역을 차지해 울타리에 둘러싸여 있기도 하다.


나무의 종마다 성장하는 속도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거대한 나무라고 해도 100년이 넘게 자리를 지킨 나무일 수도 50년이 채 안된 나무일 수도 있다. 식물학자라면 나무를 보고 종 정도는 쉽게 맞출 수 있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거대한 나무는 오래 산 나무이겠거니 하고 지켜볼 뿐이다. 정말 오래된 나무들은 저마다의 이야깃거리가 있다. 오래된 세월 안에서 마을의 호재와 악재를 함께하며 신목이 되기도 하고 당제목이 되기도 한다. 어깨가 사르르 떨리는 전설이 함께 전해지기도 하고 그네를 매달아 타기도 한다. 신목이니 당제목이니 한참 전의 이야기인 듯 하지만서도 천년을 사는 느티나무에게는 잠깐 전의 풍경일 터이다.


보호수나 노거수로 지정되어 사람들에게 여전한 경외의 눈길을 받는 나무가 있는가 하면, 지정이 되었어도 건물과 돈에 가려 보이지 않는 나무가 있고, 개발로 인해 잘려나가거나 옮겨져 방치되어버린 나무도 많다. 이곳 제주에서는 커다란 나무를 마을마다 올려다볼  있는 반면 서울 도심에서 가로수 이외의  나무를 찾기는 쉽지 않다.



제주시 조천읍에서 축구장 10배 이상 면적의 곶자왈이 훼손되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팽나무, 서어나무를 포함한 만 그루 이상의 나무가 베어졌다고 한다. 곶자왈은 숲의 제주어인 곶과 나무와 덩굴, 암석이 뒤섞인 덤불을 뜻하는 자왈의 합성어로 제주의 특수한 자연환경이며 수많은 야생동물의 서식지이다. 그래서 법으로 보호받고 있지만 이번 사태의 범인은 그 곶자왈의 소유주라고 한다. 개발을 위해서 법 사이의 구멍을 찾아낸 것이다.


나무들의 이런 수모들이 나는 안타깝다. 이곳 제주의 곳곳에 존재하는 들풀과 꽃과 거대한 나무들도 이곳이 개발된다면 베어지고 사라질 것이다. 모든 생명은 자신의 이익을 찾는다. 벌은 자신을 위해 꽃마다 돌아다니며 꿀을 모으고 나무는 햇빛을 받기 위해 가지를 뻗는다. 식물은 그것을 이용해 수분을 하고 새는 가지 위에 둥지를 튼다. 인간은 인간을 위해 숲을 베고 꽃을 꺾는다. 그런 모습을 보면 참 생각이 짧다는 생각이 든다. 벌이 꽃들을 마구 꺾어 꿀을 따르지 않는 이유는 다음의 꿀을 얻기 위해서이지만 인간은 다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숲을 없애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 쓰레기를 버리면 어떤 식으로 되돌아오는지 모두 알면서 바로 지금만을 생각한다.


며칠 전에는 용머리 해안에 가서 해안가로 밀려온 쓰레기들을 주웠다. 낚시의 부산물 등 플라스틱 쓰레기들이 가장 많았고, 주사기나 과자봉지, 술병, 폐그물 같은 다른 쓰레기 종류도 많았다. 치우면서 생각난 말은 어렸을 때 숱하게 들은 말. '어지르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지!' 아무리 이런 글을 쓰고 환경오염에 대한 뉴스가 많아진다 해도 여전히 치우는 사람보다 버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인간은 너무 똑똑한 나머지 불편한 것보다는 편한 것만을 원하고 그렇기 때문에 두 번 생각하는 것보다 한번 생각하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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