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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석 Dec 20. 2022

쓸모와 실격

20년 12월 2일

그것은 참 좋아하는 뮤지션이자 작가이자 책방 사장님이자 영화배우이자 영화감독인 한 사람의 그 노래를 듣고 나서부터 항상 나의 화두였다. 그것은 처음 접한 그 후로 나를 좌절시켰다가 좌절에서 끌어올렸다가, 다시 침묵하였다가 수면 위로 튀어올라 나의 이런 떠듦을 유도했다. 그 떠듦은 글로써의 떠듦이었다가 술자리에서의 떠듦이었다가 그러다가 감정이 벅차오른 나의 떠듬이었다가를 반복했다.   

   

글로의 떠듦인 이번 그것은 언제나처럼 나의 존재와 쓸모이다. 어느새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느새 입학하고 어느 새에 졸업했다. 어느새 스물여섯이고 스물여섯은 한 달을 채 남기지 않았다. 이따금씩 보는 텔레비전과 연예인들은 점점 더 어려지고 옛 영화의 배우들은 지금 내 또래이다. 실제의 그들은 사십 줄이 훌쩍 넘었음에도 스크린의 그들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그래, 그들은 이미 쓸모 있는 존재이다. 그들의 스물여섯스물일곱을 담은 영화는 불멸(不滅)할 것이다. 그에 비해 나는 멸하지 않을 무엇을 남겼나. 기껏해야 남긴 것은 내 감정을 토해낸 글 몇 줄과 어린 건축과 학생의 치기 어린 작업 몇 개뿐이다. 내비두면 멸(滅)할 것들이다. 나의 존재와 쓸모가 아직 바람에 스러질 위치에 머무르는 것은 그 변화의 기울기가 미미한 데에 있다. 기울기가 미미한 것은 최고와 최저의 차이가 보잘것없음을 뜻한다. 나는 군인이지만 군인이 아니고, 건축과를 졸업했지만 건축가는 아니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것에 취미를 두고 있지만 단지 엄지발가락을 퐁당 담고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학생과 사회인 사이 어중간한 바닥 위에 배꼽을 내비치고 누워있는 한량에 불과하다. 군대와 글과 건축과 사진 사이에서 아무것도 아닌 무게로, 0과 1 사이 정도의 무게로 유랑하는 먼지 같은 존재다.     


먼지는 먼지 자체로 분명 의미 있다(앞서서 말한 그 사람도 이런 말을 했다). 바윗덩이가 바윗덩이로 먼지를 대체할 수 없고, 먼지가 먼지로서 바위를 대신할 수 없듯이 먼지에게는 먼지의 역할이 있고, 바위에게도 그의 역할이 있다. 그러니까 내가 이런 글을 써내리는 것은 자괴감 같은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현실을 그저 써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동정은 마시길(괜한 당부). 의미 있는 쓸모라 함은 그것이 사라지고, 사라진 자리를 다른 존재가 올바르게 채웠음에도 느껴지는 아쉬움이나 그리움 같은 것인데, 모순적이지만 그런 움들을 받아보고 싶은 것 또한 현실이다. 아직 건축가는 아니지만, 건축과를 졸업한 사람으로서 내 열망의 끝은 불멸을 향해있다. 죽고 나서 남아있는 내 건축과 글과 사진을 염원한다. 아이를 낳지 않고 살고 싶다는 바람이 생긴 이후에 묫자리에 대한 걱정이 생겼다. 친척이 챙겨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죽고 난 뒤 십 년이 지나고 십오 년이 지난 후에는 묘비판을 덮는 풀과 먼지는 누가 치워줄 것이며, 아무도 찾지 않고 관리비도 내지 않는 묫자리를 두어야 할 이유가 묘지의 관리인 입장에서 두고 봐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쇼팽과 삐아프와 코르뷔지에의 묘지는 그 후손이 있지 않더라도 남아있다. 죽고 나서도 남아있는 것, 불멸이란 단어는 간단하지만 영원한 것은 영원이라는 단어밖에 없다는 말처럼 불멸을 실현할 수 있는 존재는 그렇게 많지 않다. 육체가 스러지고 나서도 면식조차 없는 존재들의 의식에 박혀있는 것, 그것이 불멸의 시작인데 그것을 실제로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남기는 것부터 시작한다. 보잘것없는 것이 아닌 것을 남기는 것. 테세우스가 들어 올리는 섬돌이나 선인장의 가시처럼 존재의 무게에 상관없이 의식 속에 상실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존재를 창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나의 욕심은 그곳에 있다. 내 건축물이 후에 핀터레스트와 아키데일리의 한 페이지에 올라오고, 일 년에 한두 번씩 “이 사람이 당신의 작품을 베꼈어요”와 같은 메일이 날아오고, 건축계의 저명한 상인 프리츠커 상의 후보에 세네 번 오르다가, 말년에 운이 좋아 수상한 후에 70살이 넘어서도 건축을 계속해보고 싶다. 내 글과 사진이 누군가에게 용기를 주고, 누군가 술을 마실 때 생각이 나고, 누군가 책을 볼 때 생각이 났으면 좋겠다. 사실, 조금은 우울했다. 조승우 배우가 영화 ‘타짜’를 찍을 때 나와 같은 나이였다는 사실을 알고 지금껏 줄곧 그런 생각을 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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