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8월 17일
세상이 너무 빠르게 시간을 스쳐 지나간다. 지는 햇빛에 금색으로 빛나는 건너편 건물의 벽이 너무 이뻐 재인과 산책을 나선다. 제주에 온 지 열흘이 지났지만 산책은 오늘이 처음이다. 아주 조용한 동네다. 너무 조용해서 고양이의 발걸음 소리가 들릴 것 같다. 십 분 정도 오르막을 오르고 나니 평지가 나왔다. 방향을 바꾸어 걷다 보니 저 멀리 라디오가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 같기도 하다. 혹은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고장난 라디오를 통해 들리는 소리 같기도 하다. 조금 더 가까이 걸어가 보니 밭 건너편 나무에 새들이 오가며 지저귀는 것이 보인다. 건물에 살짝 가린 나무의 가지와 이파리가 허공을 빽빽이 채우고, 마치 채우지 못한 부분을 미처 세지 못할 만큼의 새들이 채우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집 토토로’에서 토토로가 금세 키운 커다란 나무 같다.
밭 주위의 길을 빙 둘러 나무 가까이로 갔다. 나무는 밭과 집이 겹쳐지는 곳에 서 있었다. 이미 나무 주위는 엄청나게 많은 제비 떼가 날아다니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다른 하늘에서 이 나무를 향해 제비들이 날아들었다. 신비로움을 넘어서 수상쩍었다. 무슨 연유로 이 나무에 제비가 넘쳐나는 것일까. 철을 맞아 돌아오는 제비들의 허브 같은 곳인 걸까. 먹을 것도 숨을 곳도 많다고 소문이라도 난 것일까. 그 사이에도 제비들의 모습이 나무로 계속 날아든다. 이미 지고 있던 해는 마저 기울어 나무도 제비도 검정색으로 보인다. 그림자처럼 보이는 거대한 나무의 검은색과 끊임없이 날아다니는 제비의 검은색. 하늘의 희끄뭇한 백색 옆으로 구름이 길게 늬여서, 져버린 해를 쫒아가는 마지막 불그스레한 빛을 받는다. 하늘을 가르는 전깃줄 또한 검정색이다.
흑색이 아닌 검정색이다. 흑색과 검정색은 근본에서의 차이가 있다. 검정색이 색의 무에서 오는 색이라면 흑색은 색의 합이다. 검정색은 색의 부재이기 때문에 그 밀도와 농도가 일관되지만 합이란 불균형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나무와 제비는 햇빛을 등진 검정색이다. 나무와 제비의 모습과 울음소리는 일관된 모습으로 검정색의 수상쩍음을 주었다. 나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일관된 수상쩍음 또한 자연임에는 거짓이 없다. 물과 물이, 물과 공기가, 거품과 물과, 거품과 공기가 무한하게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파도 소리가 자연이듯, 이해하지 못한 이유로 무한히 제비를 불러들인 나무의 울음소리도 자연이다. 인간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괴롭고 이상한 단어로 치부하곤 한다. 순간을 이해하고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연의 자연스런 모습을 ‘해충’, ‘박멸’ 등의 단어로 묘사하고 괴담이나 재해로 폄하한다. 자연스러운 먹힘과 먹음, 상해와 죽음을 그로테스크함이라 부른다. 나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제비와 나무의 움직임을 그로테스크함으로 칭하겠지만 그곳에는 사실 그저 자연이 있을 뿐이다. 나무는 나무의 의지와 섭리대로 가지를 뻗었을 뿐, 덩굴은 그의 의지와 섭리대로 나무를 감싸고 제비는 제비의 의지와 섭리대로 날아와 울고 해는 해의, 구름은 구름의, 공기는 공기의 그것으로 그리하였을 뿐, 이해에 다다르지 못한 것은 인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