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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깨우는 브런치카페

상상은 나래를 타고 풍선처럼 부풀어올라

by 새이버링

숙소 맞은편 대로를 건너 브로드워터 파크랜드 공원에 가려면 신호등까지 한참을 걸어야 했다. 다리와 육지가 연결되는 도로 옆에 메리톤 사우스포트가 있었으므로 신호등이 없는 게 당연했다. 길만 건너면 공원인데... 신호등을 건너지 않고 빨리 가는 방법이 하나 있기는 했다. 다리 아래로 육지를 빙 둘러 걷는 것이다. 한 번은 눈앞에 공원을 놔두고 빙 둘러 걷기 싫어서 단 한 번 무단횡단을 시도했다가 다리 쪽에서 빠르게 돌진해 오는 차에 깔려 호주에 묻힐 뻔했다. 이후 공원으로 갈 때 무조건 다리 아래로 빙 둘러 걸어갔다.


여느 날처럼 다리 아래로 걷다가 녹음이 짙은 Broadwater Parkland 공원 입구에서 잠시 멈춰 섰다. 작은 계단이 보였다. 골드코스트에 온 지 5일째, 새벽 산책으로 부지런히 걸어 다닌 덕분에 목가적인 동네 사우스포트가 손바닥 안에 훤히 들어온 참이었다. 익숙해지면 지루해질까 봐 조바심이 난다. 나 같은 조급증 환자는 늘 새로운 자극에 목이 마른데, 마침 저 계단이 거슬린 것이다.


‘이 계단은 어디로 향하는 거지?’


쓸데없는 호기심은 없다. 궁금하면 가보면 될 터, 계단을 올랐다. 막혀있으면 되돌아 올 참으로 U자 모양으로 난 계단을 계속 걸어 오르니 걸어서 다리를 건널 수 있는 인도가 쭉 뻗어있었다.


'사람이 건널 수 있는 다리였구나?'

나는 잠시 고민하며 끝이 보이지 않는 아치형의 다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멀리서 단단한 근육질의 남성이 아침햇살을 받으며 내 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여길 건너는 데 얼마나 걸릴까? 되돌아오는 길이 너무 멀지 않을까? 건너면 뭐가 있을까?’


공원으로 걸을까 다리를 건널까 고민했던 길

무엇이 나를 그 다리로 이끈 걸까. 특유의 호기가 발동해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아치의 중앙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시야가 넓어지면서 해변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왔다. 눈이 부시게 반짝이는 윤슬은 새벽의 선물 같았다. 쨍하게 비친 해를 가려주는 나무그늘은 없었지만 구름이 간간히 만들어주는 그늘로 더위를 식혔다. 가까워지는 새로운 육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다리를 건너기로 한 것은 잘 한 결정이야.’


갑자기 스스로가 뿌듯해지면서 혼자 웃음이 픽 터졌다. 섣부른 자부심이다. 새벽에 일어나서 낯선 동네를 산책하는 일 자체가 용기가 필요한 일인데, 눈에 보이는 평범한 산책로를 벗어나 새로운 산책로를 개척했다는 사실이 벅찼다. 그제야 구글맵을 켜보니 300m쯤 되는 다리였고 내가 도착한 동네는 메인 비치라고 불렀다. 해변을 따라 산책로가 있고 앞으로는 주택가, 오른쪽은 폭이 넓은 도로에 자동차가 쌩쌩 지나다니고 있다. 기쁨과 함께 신호가 찾아왔다. 카페인. 혹시 이 근처에 카페가 있을까. 나는 지금 커피가 매우 마시고 싶은데.


지금 문 연 카페 hot shott 별점: 4.7 거리: 500m

구글비서를 불러 평점 4.0 이상인 카페를 찾도록 했다. 평점 4.0만 넘어도 좋을 텐데, 평점이 무려 4.7이라니, 이런 카페를 안 간다는 건 평생 후회할 일이다. 다만 숙소까지 되돌아오는 길이 너무 멀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잠든 아이들을 두고 나왔기 때문이다. 고민은 시간만 좀먹는다. 안 되겠다. 여기를 가 보자. 오래 걸린다 싶으면 뛰면 되지.


가볍게 눌러쓴 모자를 살짝 들었다. 목표가 생긴 느낌이다. 그곳에는 정확히 내 취향을 저격하는 메뉴가 있을 것이다. 평점 4.7이라는 숫자는 쉽지 않은 점수다. 500미터를 걷는 동안 강한 확신과 함께 많은 생각이 찾아들었다. 지금은 골드코스트와 함께 기억될 두근거림이 창조되기 직전이다. 조깅을 하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쳐 짧게 눈인사를 나눴다. 커다란 셰퍼트와 새빨간 캡을 쓴 아저씨도 보였다. 본능적으로 모자에 오버로크 된 노란 글씨를 읽었다. 소속된 스포츠 클럽에서 나눠 준 모자인가. 저 아저씨는 뭘 하는 사람일까? 집은 어딜까? 오늘은 어떤 하루를 보낼까? 아니, 대체 나는 왜 이런 게 궁금한가. 나를 스치는 낯선 이의 뇌와 그의 역가 왜 이렇게도 궁금한 걸까.


메인비치의 아침풍경은 사우스포트와 비슷하면서도 새로웠다. 이른 아침인데도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이 보였다. 춥지는 않을까 잠시 걱정했는데 더운 햇볕에 중요한 부분만 겨우 가린 채로 몸을 말리고 있었다. 바닥에 앉아 낚시를 하는 노인, 기다란 카약을 타려고 준비 중인 아저씨도 보였다. 구글맵은 부유한 저택이 줄지어 선 골목길로 나를 안내했다.


‘이 근처에 브런치카페가 있는 게 맞나?’



도무지 상점가라고는 보이지 않는 골목. 숙소에서 제법 멀어진 듯한 기분에 마음이 들썩였다. 다리 하나만 건넜을 뿐인데 아득히 먼 곳에 온 느낌이 드는 걸까. 2층 발코니에 줄지어 놓인 색색의 화분, 라탄의자에 툭 걸쳐진 꽃무늬 블랭킷. 정원에 식수를 뿌리는 아저씨, 예쁜 꽃나무를 꺾지는 말아 달라는 사려 깊은 메시지. 생크림케이크같이 깨끗하고 단정한 외벽, 프랑스 풍 스트라이프 어닝과 하늘을 찌르는 기이한 나무도 온통 다른 세상 같았다. 여기는 부촌임이 확실하다. 눈에 담기는 것이 많을수록 나도 부자가 됐다. 세상의 평화가 전부 이곳에 있었다. 남의 집구경에 정신을 홀라당 빼앗겼다. 사우스포트와는 다른, 고풍스럽고 여유 있는 동네의 에너지가 나를 매료시켰다.


그나저나, 대체 어디에 브런치카페가 있다는 것일까?


목적지까지 1분이 남았다. 이쯤 되면 상점가와 행인이 눈에 들어와야 하지 않을까. 나는 여전히 인적이 드문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서걱서걱 걷고 걷다가 골목 끝에 커다란 나무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카페의 정체가 드러났다. 길에는 사람이 없었지만 카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신기한 풍경이었다. 우리나라로 치면 해장국을 먹으러 나온 사람들일까? 재밌는 상상을 했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해장하는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르지. 노인도 있고 아이도 있고 젊은 커플도 보였다. 심지어 커다란 개도 주인 옆에서 미라클모닝을 하는 중이었다. 바로 보이는 테라스 좌석이 비었다. 빈자리는 제일 좋은 자리이거나 제일 나쁜 자리일 것이다. 이 순간에도 자리에 배팅을 한다. 휴대폰을 테이블에 놓고 앉았다. 나를 본 마르고 키 작은 여성이 환하게 인사하며 다가왔다.


“제일 좋은 자리에 앉았네요”


내 마음을 읽은 것인가. 짐짓 놀라며 메뉴판을 받았다. 먼저 오트플랫화이트를 주문하고 구글맵 후기에서 본 사진을 보여줬다.



Bagle Board라고 했다. 간소한 아침메뉴($18)와 든든한 점심메뉴($24)가 있다고 했다. 간소한 아침의 베이글보드로 주세요. 빠르게 서빙된 베이글보드를 마주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체 뭐가 간소하다는 거지? 둘이 먹기에도 충분한 양이었다. 골드코스트는 확실히 시드니에 비해 물가가 저렴했다. 커피까지 해도 부담 없는 가격이었다. 일단 제일 중요한 가격이 합격.


테이블을 가득 메운 우드플레이트 위에 붉고 푸른 것들이 알록달록 향연을 펼치고 있었다. 하나하나 따져보니 베이글 샌드위치에 들어가는 재료들이다. 소금과 후추가 뿌려진 아보카도, 적양파와 오이, 방울토마토, 피클, 새싹채소, 삶은 달걀, 케이퍼가 올려진 훈제연어와 프로슈토햄, 쪽파크림치즈까지 빠짐없이 ‘베이글 샌드위치’ 재료들이었다. 나란히 올려진 샌드위치 재료들이 이토록 확실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다니. 예술작품에 가까운 플레이트였다. 이 메뉴를 개발한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이건 한국에 돌아가서도 반드시 따라 해 봐야지.


'아니지, 이 메뉴로 카페를 하나 차려볼까?'


지금처럼 동이 틀 무렵, 문을 연다면 어떨까. 아파트로 빽빽한 우리 동네는 새벽에 문 여는 카페가 없다. 만약 내가 6시부터 영업하는 브런치가게를 차리고 베이글보드를 판매한다면 손님이 얼마나 올까. 처음엔 손님이 없을지도 몰라. 새벽에 문 여는 카페가 없다는 것은 수요가 없다는 뜻일 테니. 그렇지만 조금만 생각을 달리 해보자. 새벽에 문 여는 카페가 있는 줄 알면 새벽에 일찍 일어나 카페에 찾아오는 손님도 생기지 않을까. 만약 우리 가게의 베이글 보드가 극강의 맛을 낸다면? 오고 싶지 않을까? 우리 가게라고? 후훗, 벌써 가게를 차렸네 차렸어. 상상은 나래를 타고 끝도 없이 이어졌다.


베이글 위에 올려진 형형색색의 천국을 한 입씩 음미하며 성공한 사업가가 되는 터무니없는 공상에 빠졌다. 아삭한 오이를 천천히 씹으며 카페를 차리기에 적당한 동네의 빈 땅을 물색했다. 남은 베이글에 쪽파크림치즈를 바르며 베이글보드 외에 추가할 메뉴들을 궁리했다. 고소한 플랫화이트를 한 모금 마시며 오트밀크로 만든 플랫화이트도 반드시 팔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휴지로 손을 닦으며 6시에 온 손님에게는 할인혜택을 제공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우리 동네 사람들의 기상시간을 바꾸는 브런치카페. 어떤가, 코리안타임스에 실릴만한 성공한 기업가의 최초는 이런 모양이 아닐까. 우리 동네 주민들을 새벽에 갈 곳이 없어 늦잠 자는, 게으른 사람들로 만들어버린 허풍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일찍 돌아가긴 글렀다. 그리고 오늘 할 일은 다 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가장 잘한 일은 다리를 건너겠다고 결심한 일. 부지런한 허풍을 떨고 최대한 느긋하게 카페를 즐기다가 빠른 걸음으로 숙소에 되돌아왔다. 이후 핫샷은 골드코스트에서 내가 가장 많이 방문한 카페가 되었다.


*초고에는 있었지만, 분량 때문에 <우리의 겨울이 호주의 여름을>에 싣지 못했던 에피소드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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