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은 떠올리지만 누구도 실천하기 어려운 결심
당신은 작정하고 일정 기간 동안 쇼핑을 참아본 적이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지난 2023년, 약 1년 동안 옷을 한 벌도 사지 않았다.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하지만 누구도 실천하기 어려운 결심. <옷 안 살 결심>
지난해 휴직을 하고 내 자유의지를 시험대에 세웠다.
‘만약 내가 연말까지 옷을 한 벌도 안 살 수 있다면 나는 마음먹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해내나 두고 보자는 심보로 <옷 안 사기 챌린지>를 시작했다. 옷, 가방, 장신구, 신발 등 나를 치장하는데 필요한 모든 물건의 구매를 중단했다. 일 년치 쇼핑 횟수를 세어본 적은 없지만 과거의 나는 기준도 제약도 없이 쇼핑을 했다. ‘이런 스타일은 내 옷장에 없지, 사면 잘 입을 것 같아.’ 이렇게 속으로 나 자신을 졸랐다. 옷장 속에는 최소 서너 벌의 흰색 셔츠와 대여섯 벌의 청바지가 있음에도 흰색 셔츠와 청바지만 보면 눈이 돌아가는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재빨리 유행을 따르고 싶었고, 택배 박스 뜯는 기대감으로 배송일을 기다렸다. 그런 내가 쇼핑을 멈추기로 선언한 것이다. 누구에게? 나 자신에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동네를 산책하거나 마트에 갈 때는 단정하고 깨끗한 옷을 입었다. 약속이 있는 날엔 그나마 가장 최근에 산 옷을 입었다. 옷을 안 산 것 치고는 그럭저럭 잘 지냈다. 유행하는 스타일보다는 '내가 가진 옷'의 범위 내에서 어울리게 입었다. 본래 나는 ‘꾸안꾸(꾸민 듯 안 꾸민 듯 보이는)룩’에 집착하곤 했는데, 챌린지를 중에도 '꾸안꾸'만은 포기할 수 없어 아래의 세 가지 필살기를 썼다.
남편 옷 빌려 입기
루즈핏, 박시핏은 은근히 시크하고 스타일리시하다. 전에는 한 번도 눈길 준 적 없는 남편 티셔츠(나이키)를 훔쳐 입기 시작했다. 반바지나 트레이닝팬츠에 남편 옷을 무심하게 툭 걸쳐 입으면 새 옷을 장만한 듯한 착각이 들곤 했다. 남편은 그런 나를 너그럽게 대했지만 내심 자기 옷이 다 뺏길까 봐 경계하는 눈치였다.
레깅스&조거팬츠
조거팬츠랑 레깅스, 바이커팬츠 같이 기본에 충실한 하의는 상의 조합만 바꿔 입어도 질리지 않았다. 나는 이 하의들을 빨고 입고 되풀이하면서 같은 옷을 두 벌씩 사는 특이한 사람들의 마음을 200% 공감했다.
(기본에 충실한 하의들은 챌린지 시작 전 여름과 가을에 안다르, 탑텐에서 5만 원 이내로 구매했다.)
양말과 모자, 에코백, 맨투맨 등으로 포인트주기
양말과 모자 두어 개를 번갈아 가며 밋밋함을 포장했다. 챌린지 시작 몇 달 전 구매한 것부터 산 지 2-3년 이상 된 것들까지 있는데 자주 번갈아 착용하며 쓸모를 늘려 나갔다. 모자는 투톤 배색이 있는 무신사 스타일(Clove, Emis)이고, 양말은 짙은 꽃무늬와 스트라이프가 눈에 들어오는 마르디 메크르디, 나이키 제품 등을 애용했다. 에코백이나 알록달록한 색감의 가방, 맨투맨을 어깨에 걸치는 방식으로 포인트를 줬다. 새로운 조합은 새로 산 물건인 냥 나를 속였고, 나는 기꺼이 속았다.
위 필살기들은 말 그대로, 있는 옷의 범위에서 최대한 꾸며 입으려는 억지스러운 몸부림이라 생각되면서도, 내가 산 물건에 ‘뽕뽑자’는 기세였다. 이런 생각이 돈을 아끼고 환경을 지키는 두 마리 토끼도 잡아 주었다.
'꾸안꾸룩'을 전투적으로 사수하며 1년간 옷을 안 사니 옷(외면) 보다는 몸과 마음(내면)의 건강에 관심이 기울고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치장을 멈추니 본래의 내 몸, 즉 피부나 몸매(a.k.a. 이너뷰티)에 신경을 쓰게 되고 아낀 돈으로 자녀 교육비, 여행 등 가치 있는 경험에 투자하고 싶어졌다. (놀랍게도 이것은 부자의 특성으로 자주 언급되는 표현이다.)
트렌디하게 입지 않아도 내 마음이 당당하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일주일에 한 번만 입을 스타일을 서너 번 입는 것도 처음엔 용기가 필요했는데 몇 번 하다 보니 생각보다 부끄럽지 않았다. (사람들은 나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 한 번은 가끔 만나는 친한 동생이 우리 동네에 놀러 와 커피 한 잔을 함께 마셨는데, “언니는 집 앞에 나와도 이렇게 예쁘게 입고 나와?”라고 말해서 속으로 얼마나 짜릿했는지 모른다. 물론 옷 안 사기 챌린지 중인 것은 비밀로 했다. 혹시 성공 못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때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1년쯤 옷 안 산다고 해서 시대에 격하게 뒤떨어지는 것도 아니지 뭐...'
한 번 입은 옷을 가까운 시일 내에 또 입으면 안 된다는 이상한 논리가 그동안 내 지갑과 외출준비 시간을 얼마나 갉아먹고 있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옷을 안 사도, 어제 입은 옷을 오늘 또 입어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잖아?‘
수년간 내 사고에 뿌리 박힌 잘못된 신념을 바로 잡아야 했다.
위기의 순간도 많았다. SNS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어느새 마음에 드는 옷을 장바구니에 넣고 회원가입까지 마친 뒤 결제창에서 뭔가에 홀린 나 자신을 발견해 다급히 휴대폰을 꺼 버린 적도 있다. 샵을 지나가다 별생각 없이 구매를 고민한 적도 수없이 많다. 이런 많은 위기에도 꿋꿋이 버텨내 결국 연말까지 옷 안 사기 챌린지에 성공했다.
성공한 나 자신에게는 12월 마지막 주, 38만 원짜리 겐조(KENZO) 니트를 하사했다. (생각보다 비싼 옷이지만 10년은 입을 작정으로 샀다. 1년을 참고 하사한 상인데 이 정돈 돼야지?라는 합리적 핑계를 대 본다.) 이 니트는 앞으로 나의 다양한 '꾸안꾸'룩을 도울 것이다.
옷 안 사기 챌린지의 성공 비결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그중 하나는 내가 휴직기간이었다는 사실이다. 매일 출근하며 갖춰 입어야 하는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것. 그러나 옷 안 사기 챌린지 이후 복직한 지 6개월이 지난 지금껏 나는 옷을 딱 한 번 샀다. 옷장에 있는 옷을 적당히 바꿔 입었고 같은 옷도 여러 번 입었다. 옷에 대한 마음가짐이 180도 바뀐 덕분이다.
두 번째 성공 비결은 다름 아닌 ‘독서'다. 자기 계발서를 많이 읽다 보니 내가 나 자신의 지휘자가 되어야겠다는 욕구가 강하게 차올랐다. 나 자신이 지휘하는 인생에서 나는 옷의 노예로 살지 않아도 된다. 미니멀라이프에 관한 책을 읽으니 옷과 장신구, 신발이나 가방 등은 이제껏 산 것으로 충분하다고 느끼게 됐다. 아니 이미 산 것들로도 차고 넘쳤다. 사람이 사는데 그렇게 많은 옷과 가방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독서를 하다 보니 책에 담긴 지혜와 지식이 욕심이 났다. 이 나이(만 40세) 되도록 내 지식과 지혜가 이토록 얕은 줄 몰랐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많다고 느낀다더니, 내가 꼭 그랬다. 시간이 날 때마다 닥치는 대로(이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지만) 읽었다. 전자책이나 오디오북 한 달 구독비용은 옷 한 벌 값도 안 됐다. 챌린지를 성취하고 이런 변화를 고백하는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많은 사람들이 기간을 정해 쇼핑을 멈춰 볼 것을 권하고 싶다. 휴직과 같은 신변의 변화를 계기 삼아도 좋고, 1년이 길면 6개월로 기간을 줄여 보는 것도 괜찮다. 챌린지를 하면서 자기 계발서나 미니멀라이프를 주제로 한 책을 읽으면 시너지가 생긴다.
끝으로 챌린지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가장 귀한 소득은 바로 ‘내가 마음먹은 것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긍심이었다. 이 믿음은 남은 내 인생의 백지수표가 되어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챌린지와 함께 하면 좋은 추천 반려도서
- 타이탄의 도구들 (팀 페리스)
- 심플하게 산다.(도미니크 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