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 디스크로 움직일 수 없는 동안 전화 상담을 받았다. 허리가 어느 정도 회복이 되고부터는 대면 상담을 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한의사 선생님께서 추천해 주신 상담 센터에 가게 됐다. 유의미한 날이었다. 디스크로부터 졸업이 한층 더 가까워진 느낌이랄까! 살짝 들뜬 마음으로 센터에 앉아 내 차례를 기다리면서 요새 관심이 많은 그림책을 손에 집히는 대로 읽었다.
최근 벨라라는 반려묘를 데려오면서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달라졌기 때문에(좋은 쪽으로) 고양이가 한가득 그려진 표지는 나의 이목을 끌 만했다. 그리고 평균 15년 정도 사는 고양이가 백만 번을 살았다니,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 벨라도 나만큼은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아, 벨라는 내가 키우는 고양이 이름이다.) 왜 이기적으로 나만큼이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 이유는 이성이 없는 동물이라도 주인이 먼저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것을 지켜보는 건 너무 슬플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벨라의 마지막은 내가 정리해 주고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오히려 무기력한 나에게 삶에 대한 희망과 책임감을 심어줬다. 아이러니하다.
까만색의 멋진 얼룩 고양이는 마지막 한 삶을 제외하고는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 백만 명의 사람들이 이 고양이를 귀여워하고 죽었을 때 울었으나 고양이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단 한 번도 고양이가 원하는 삶을 살지는 못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지 못하는 동물들의 애환이 그대로 느껴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우리 벨라는 나라는 특성의 주인을 만나서 과연 행복할까? 얼룩 고양이는 어떤 직업이나 사람한테도 만족하지 못했다. 아니 싫어했다. 이유는 그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는 생각했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나로 태어났으나 나로 존재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여자아이의 등에 목이 졸려 머리가 덜렁거리는 채로 묻혔다는 대목에서는 너무 사실적으로 머릿속에 그려져서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다시 생각했다. 이게 아이들이 읽는 그림책이 맞을까? 잔혹 동화 같았다. 한편으로 성악설이 떠올랐다.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것. 어린아이들의 순수함이 더 잔인할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몰라서 그랬다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모르고 저지르는 악행이 가끔은 더 잔인하고 못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고양이는 도둑고양이가 되고서야 자유를 만끽한다. ‘Love myself’ 그 자체. 요즘 시대의 갓생 마인드와 일치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 다음은 뭘까? 바로 타인. 사랑하는 대상을 만나는 것이다. 암고양이들은 자기들이 겪어보지 못한 삶들을 살아온 얼룩 고양이의 신부가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얼룩 고양이의 선택은? ‘너는 너고 나는 나’가 가능한 하얀 고양이였다. 자신을 정말 사랑하게 되면 자신과 타인을 분리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얼룩 고양이는 그것을 알아본 게 아닐까?
멋진 고양이가 서로를 알아보듯이 나도 멋진, 아니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좋은 사랑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좋은 상황이나 사람을 구하기 위해 밖에서 헤매지 않고 내면의 문제를 마주하고 다듬는 시간이 필요하다. 얼룩 고양이가 정말 살아 있는 마지막 한 번의 삶을 살기까지 그 무수한 시간 동안 죽고 살아나길 반복했던 것만큼 어쩌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당장 그런 삶을,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고 조급해할 것이 아니라 마음을 조금은 내려놓기를 바란다. 언젠가 그때는 꼭 올 것이고, 멋진 하얀 고양이가 나타날 때까지 나는 나를 다듬고 응축하는 시간을 ‘꾸준하게’ 지키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얼룩 고양이가 하얀 고양이를 보내고 한 페이지 가득 우는 장면이 나온다. 이 부분에서는 내가 무수히 겪은 인간관계의 이별을 떠올렸다.
온 마음을 다해 무너졌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그 얼굴들이 하나씩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한 분 한 분, 나에게 너무나 소중했던 사람. 이제는 (시)절 (인)연이지만 한때는 필연이었던 사람.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들을 떠나보내야 했던 나에게 진심으로 애도를 표한다. 그리고 다들 하는 일 다 잘되고 진심으로 행복하기를 바란다.
나에게 삶에서 벌어지는 우연을 받아들이는 법을 알려준 친구가 있다. 나를 위해 기도를 해준 친구다. 울면서 내가 하는 이야기들을 다 들어주고 위로해 줬으면서도 손을 꼭 잡고 두 눈을 감고 기도했었다.
‘내가 미처 보듬어주지 못한 마음까지도
하느님이 보고 계신다면 돌봐주세요.’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오열했고,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눈물부터 난다. 이상하다. 마음속 깊이 위로가 된다.
가끔 사람들은 그렇게 얘기한다.
‘이만큼이나 위로해 주고 들어줬는데도 얼마나 해야 해? 이제 듣기 지겨워.’
스스로도 생각한다. 왜 나는 이렇게 날 위해주는 데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 걸까? 그런 참에 들었던 저 말은 드디어 나를 내려놓게 해 줬다. 이래서 사람들이 종교를 갖는 걸까? 이제는 멀어져서 저 친구를 더는 볼 수 없지만 고마웠던 마음은 아직도 많다. 너무 고마웠다. 그리고 이번에는 마지막에 항상 나한테 해줬던 말을 돌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