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올라온 지도 벌써 20년의 세월이 흘러가고 있다. 처음 서울로 올라 올 때 이불 한 채와 밥과 국그릇 한 세트와 작은 밥상을 아버지의 차에 싣고 익산에서 3시간 반을 운전해서 올라왔다. 그리고 학교 앞에 얻은 반지하방에 간소한 짐을 부려놓고 고향집에서부터 싸온 밥과 반찬으로 부모님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막내딸을 이렇게 멀리 보내게 될 줄 몰랐던 부모님은 마음의 준비도 없이, 나 또한 고향집을 떠나 서울살이를 시작할지 예상하지 못한 채 햇빛이 반만 들어오는 지하방에서 서울에서 첫 끼니를 챙겼다. 그리고 벌써 20년의 시간이 흘러버렸다.
서울살이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푼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껏 모든 삶을 살아왔던 익산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더욱이 부모 없이 독립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걸 생각하니 알 수 없는 묵직한 감정이 잠을 자려고 누우면 마음을 짓눌렀다. 그리고 그 밤 카세트테이프로 듣던 노래 중에 양희은의 노래가 홀로 눈물짓게 했다.
그 노래는 바로 양희은의 ‘서울로 가는 길’이라는 노래다.
‘아침이면 찾아와 울고 가던 까치야/나 떠나도 찾아와서 우리부모 위로해/나 떠나면 누가 할까 늙으신 부모 모실까/서울로 가는 길이 왜 이리도 멀으냐/앞에 가는 누렁아 왜 따라나서는거냐/돌아가 우리부모 보샬펴 드리렴/나 떠나면 누가 할까 늙으신 부모 모실까/서울로 가는 길이 왜 이리도 멀으냐‘
까치와 누렁이에게 부모님을 맡기고 떠나는 자식의 마음이 오죽하랴 싶었지만, 그래도 20년 전 그때는 우리 부모님도 아직 한창 일하시고 젊었다. 그나마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살자고,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빈자리는 누군가 채워줄 거라는 마음으로 서울로 떠나왔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나의 20년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부모의 20년의 시간은 늙어가는 시간이었나 보다. 아버지는 한쪽 청력이 좋지 않으셔서 얼마 전에 보청기를 하셨고, 엄마는 이가 좋지 않아 어금니에 틀니를 하시고 얼마 전에는 송곳니를 발치하셨다고 한다.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돌봐드리지 못하는데 자꾸 늙어 가시는 부모님의 소식을 듣는다는 것은 서울에서 마음만 동동거릴 뿐이었다. 돈으로 건강을 채워드리지 못하는 것이 중년이 되어가는 자식에게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인 거 같다.
몇 년 전 부모님은 이사를 하셨다. 정든 동네를 떠나 낯선 동네로 이사를 가셨다. 정든 동네라고 하지만 이미 몇 십 년을 함께 지내던 동네분들도 하나 둘 고인이 되셨고, 동네는 도로가 생기고, 논은 밀어버리고 공원이 만들어 지고, 새로 유입해 오는 사람들의 전원주택이 지어지면서 시내 쪽 아파트로 이사 간 분들도 많았다. 그러니 많은 이들이 남지 않은 동네였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도 그 동네를 떠났으니 나의 지난 20년 전의 20년의 삶을 살았던 동네에는 이제 나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세월이란 이렇게 사람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의 연습인거 같다. 그런데 그것이 몇 십 년을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일인 거 같다.
낯선 동네로 이사 온 엄마는 우울해하셨다. 원래 친구를 적극적으로 사귀는 성격이 아니신지라 동네분들과 친해지는 걸 어려워하셨다. 그나마 봄에는 마당 한켠의 텃밭을 일구면서 상추, 가지, 토마토, 고추, 콩, 호박을 길러 먹는 재미로 지내셨는데, 겨울이 되니 텅 빈 텃밭과 함께 엄마의 마음도 허전해 지신 듯하다.
몇 달에 한번 내려가는 나를 요 몇 년 사이 너무 반가워해주시는 것이 나에게는 아직 낯설지만, 엄마를 떠나보내기 전에 많이 만나고 함께 할 추억들을 쌓아야겠다는 마음에 전화도 자주 하고 한 달에 한번은 내려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엄마에게 다시 봄이 찾아왔다. 봄이 되면 엄마는 북부시장에 나가 수선화를 사 오신다. 녹색 줄기가 곧게 뻗어있고 노란 꽃을 피는 수선화를 나는 엄마의 텃밭에는 처음 보았다. 언젠가 흘러가면서 보았을 수선화이지만 그때는 그것이 수선화인지도 몰랐으며,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꽃도 아니었다. 그런 수선화가 작년 봄에는 엄마의 텃밭에 심겨져 있었다. 그 꽃이 하도 예뻐서 사진으로 남기기도 했었다.
엄마는 수선화를 심기 위해 낫으로 텃밭에 무성하게 자란 잡초들을 잘라내고, 수선화 한 송이를 심었다. 내 눈에도 한 송이 수선화가 가득하게 쏙 들어와서 이 꽃이 무슨 꽃이냐고 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올해 엄마는 수선화 5송이를 사와 텃밭에 심었다고 한다.
“이번 수선화는 꽃이 지지도 않고 오랫동안 피어있다.”
얼마 전 전화 통화에서 엄마가 전해 온 첫 말이었다. 나는 그 수선화가 보고 싶어 엄마에게 사진을 찍어서 보내달라고 했다. 작년에 2G 서비스가 종료되면서 스마트폰으로 바꾼 엄마는 사진을 찍어서 보내는 방법을 아직 모르신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물어보고 보내주신다고 하셨다. 그렇게 통화를 끝냈는데 잠시 후에 엄마에게서 영상통화가 왔다. 나는 무슨 일인가 해서 전화를 받았다.
“엄마! 영상 통화로 했는데? 엄마도 카메라를 켜야지.”
버튼을 잘못 눌러서 영상 통화를 했다고 한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카메라를 켜고 수선화를 보여 달라고 했지만 조작 방법을 몰라 나는 엄마의 검은 화면을 보면서 대화했다. 그리고 엄마에게 나의 삶을 조금 보여드렸다.
“엄마, 여기가 내가 일하는 회사야. 이 친구는 지난번에 같이 익산 집에 놀러갔던 회사 동료. 그리고 오른쪽에 앉아 있는 직원은 나랑 같은 팀에서 일하는 친구야!”
엄마의 노란 수선화는 보지 못했지만, 엄마의 노란 수선화보다 더 귀한 덩치 큰 막내딸의 모습을 카메라에 가득 담겨서 보여드렸다. 통화 하는 내내 엄마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가며 행복해 하셨다.
나는 엄마의 노란 수선화는 익산에 내려가서 직접 보기로 했다. 그때까지 수선화 꽃이 오랫동안 피어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20년 전에 까치와 누렁이에게 부탁했던 걸 이번에는 노란 수선화에게 부탁해본다.
‘봄이면 찾아오는 노란 수선화야 나 없어도 찾아와서 우리부모 위로해/나 떠나면 누가 할까 늙으신 부모 모실까/익산에 가는 길이 왜 이리도 멀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