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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주 May 09. 2022

진짜 혼술

지하철역 개표기를 넘자마자 그녀의 톡이 왔다.

[아~ 나 갑자기 회사에 일터져서 좀 늦겠는데...]

얼마나 늦으려나, 나도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처리 못하고 뛰쳐나온 집구석의 일을 마무리짓고 나오는 게 나을라나, 시 발걸음을 멈추고 답장을 기다려본다. 직은 코앞이 집이니 다시 돌아가도 울하지는 않을 위치이다.

하지만, 소식이 없는 폰을 바라보며 합실에서 한참을 심각하게 고민을 해보았지만 내 발걸음은 그냥 지하철을 올라 타고 있었다.

에라이~ 모르겠다. 그냥 직 훤 대낮같은 시내를 백만년만에 혼자서 방황 아보자. 




집에는 3번이 홀로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것을 30분 후에 태권도 가라고 지시해두고 나선 참이었다. 시험이 끝나고 친구들과 어디론가 신나게 놀러 나가신 1번, 2번에게 둘 중 하나는 6시30분까지 귀가하여 3번의 저녁을 해결하라고 지시를 해두었지만 먼가 누나들의 대답이 시언찮더니 아니나 다를까 7시에 귀가한 아버지가 닭강정과 라면으로 3번의 저녁을 해결했다고 다. 딸들이 귀가한 후 아버지는 다시 신나게 본인의 친구들을 찾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

이렇게, 애매한 집구석 상태로는 외출을 하지 않는 편인데 모든 가족구성원의 저녁 일정 확실하게 정해놓고 나서야 비로소 나의 세상으로 나서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간만에 시내나들이에 들떠서 서두르느라 일이 꼬였다.


어제부터 나는 시험이 끝나고 간만에 휴무기간이다. 몇 주를 계속 월, 화, , 목, , 금, 으로 이어지는 정신없는 시험 일정을 마무리하고 드디어 나도  날 만들어 내었다.

마침 시험이 끝나는  어린이날, 재량휴일로 이어지는 연휴가 시작되어 나도 학생들도 놀기가 딱 좋은 날라 학사브레이크라 이름붙여가며 이번 일주일은 통으로 쉬기로 해버렸다. 열심히 살아온  간만에 주는 휴가같은 낌이 다.

나의 연휴 소식에 미야가 자기도 반반차를 - 대기업에 다니니까 좋다며, 반반차라는 것있단다.- 쓸테니 조금 일찍 4시부터 만나서 놀자했다. 

옛날처럼 시내를 할일없이 쏘다니다가 저녁답에 검색해둔 분위기 좋아 뵈는 술집으로 찾아가 보기로 했다. 밝은 대낮에 아무일없이 시내를 거닐어본 게 얼마만인가. 간만에 이런 신나는 계획에 오전내내 들떠버렸다. 


들뜬 기분으로 그동안 미루어 둔 일들을 처리하다보니 - 미뤄둔 일 중에 가장 시급한 것은, 요즘 행동 반경이 넓어져 동네 모험이라도 떠날라 치면 찾기가 곤란해진 3번의 첫 휴대폰 개통이었다. 금세 폰만 받아오면 끝날 줄 알았더니 뭣이 이래 설명이 긴지, 휴대폰 개통을 완료하고 보니 벌써 3시 45분이다. 집에 다시 돌아가서 3번을 단도리시키고 시내갈 차비를 하기에는 빠듯하다.

부랴부랴 지하철역에 들어선 것이 벌써 4시를 훌쩍 넘겼다. 아~ 아주미의 일상이란. 왜 이다지도 하릴없이 바쁘고, 미리미리 계획을 짜 두어도 이렇게 동분서주 뜀박질인가 잠시 서글퍼하는 찰나에 미야의 늦겠다는 톡을 받았다.




언제 일이 끝날 지 모르는 미야의 연락을 기다리며 시내로 들어섰다. 늘처럼 백화점으로 먼저 들어 보았지만 오늘은 왠지 백화점이라는 한정된 실내 공간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그냥 화장실에서 급히 나서느라 미처 챙겨보지 못한 옷매무새며, 부족한 화장품 찍어 바르기를 마무리하고 바로 나와서 시내의 반짝이는 번화가로 다시 들어섰다.

예정없이 기다리기만 하는 일은 할 수 없으므로 언제라도 일정을 잘 맞추어주시는 화백님께 연락을 해 보았다. 코로나덕분에 잠시 잃어버린 내 술친구들 중 하나인 화백님도 거의 2년 만에 뵙는 것이지만, 마치 엊그제 만난 친구처럼

"화백님, 큰일이예요. 이 더운 날에 시내 혼자 방황하게 생겼어요." 하고 자연스레 연락을 해본다.

"하하하하하. 만 더 방황하고 있어봐요. 내 한 30분이면 일 마무리하고 출발할 수 있을 거 같으니까. " 하고 호탕하게 웃으신다.

이런 친구가 있음이 얼마나 행운인가.


휴대폰 길찾기 어플을 돌려보니 우리들 계획 분위기좋은 술집은 도보 27분거리라고 한다. 27분 까짓것. 그쪽으로 슬슬 걸어볼까. 나서보자.

시내의 번화가를 관통해볼까 잠시 고민했지만, 밝고 반짝이는 아름다운 젊음에 기가 죽었다. 그냥 가두리길로 쏟아지는 햇볕을 바로 받으며 걸어가보기로 했다. 이 얼마만의 땡볕인가.

저녁답에 추워질까 일교차를 걱정하며, 꺼내입고 온 가디건을 벗었다. 땀이 난다. 네이버에 검색해보니 현재 기온이 30도에 육박하는 중이다.

가는 중에 예쁜 커피숍이라도 발견하면 잠시 쉬어갈 요량이었지만, 가두리길에는 그럴만한 작고 예쁜 커피숍보다는 대형프랜차이저 커피숍의 주차장들이 여기저기 들어서 있다. 간만에 나의 여유로운 할일없는 시내길 산책을 우리 동네서도 발에 채이는 똑같은 분위기의 커피의 커피 마시러 발걸음을 멈추고 싶지는 않다. 히려 이 낯설음을 즐기는 일 좋을 성싶으다.



한참을 걸었나보다. 점점 번화가를 벗어나 아기자기한 주택들이 들어선 동네뒷길로 접어든다. 목적지가 가까운 듯하다. 예쁜 커피숍이 하나 보인다. 잠시 서성여 보았다. 이제 나이를 속일 수 없는 발목이며 양쪽 발바닥들이 조금 리하다. 등쪽으로는 땀도 조금씩 채이는 것 같으다. 저기로 들어가볼까 하고 반짝이는 줄 조명을 아기자기하게 걸어둔 작은 카페앞을 잠시 망설여 보았지만, 소심한  발걸음 머뭇거리기만 하다가 지나친다.

아무도 아는  없는 낯선 커피집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다 아무일없이 30분 에 다시 일어날 자신이 없어진다.  무에 대단한 일이라고 잠시 앉아서 멍~ 때리는 일이. 쏟아지는 햇빛을 피하기 딱 좋을 일인데 으로 촌스러운  발걸음은 머뭇거리고만 있다. 이런 여유와 낯설음을 즐겨 보는 일은 원래부터 할 수 없던 사람마냥.

그러면서 히 내 발걸음을 멈추기에는 너무 예쁘게 반짝이는 작은 커피집 조명이 살짝 부담스럽다고 핑계를 대다. 분명 저 모퉁이를 돌면 지만 부담스럽지  더 예쁜 커피집이 나를 반길거라 확신한다. 


모퉁이를 돌았더니, 커피집 대신에 작고 예쁜 술집이 나를 반긴다. 아기자기한 작은 정원이 낯설다. 설지만, 나는 지금  낯선 곳에 혼자지만, 이번에는 아, 몰라. 진짜 몰라. 그냥 들어가 버릴래. 발바닥이 너무 아프다. 다시 오던 길을 돌아 커피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아득하다. 만보계를 켜보니 벌써 만 보를 넘겼다. 이불밖은 위험하다고 집콕하는 일상속에서는 하루 천 보를 걷기도 힘이 들 때도 있는데, 그런 내가 만 보라니. 이제는 진짜 한걸음도 더 못 걷겠다. 마침 오늘의 나의 구세주, 화백님께서 출발을 하려고 택시를 불렀다는 연락이 왔다. 용기를 내어 작은 술집으로 들어섰다.

이제 막 입구의 물청소를 끝낸지라 바닥에 물이 흥건다.


"6시30분에 예약했는데 좀 일찍왔어요." 하고 멋쩍게 웃보니 시간은 아직 5시30분이다.

친절한 직원인지 사장인지 모를 젊은이가 웃으며 아무데나 편한 곳에 앉으라한다. 다행이다. 잠시의 뻘쭘함을 이겨 내고 앉았다. 거의 1시간에 의자에 앉았더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자리에 앉자말자, 얼른 생맥주 한 잔...이 없대서 맥주 한 병을 시키고 시원한 맥주를 한잔 들이킨다. 그러고 폰을 꺼내 들었다. 남겨야겠다. 저절로 지금 이 순간을 남기고 싶어진다.

편안한 몸과 마음으로 밖을 내다 보니 까의 그 낯설었던 작은 나무들이, 아~ 이렇게 예뻐보일 수가.



집에서는 수시로 맥주 서너 캔씩, 혹은 소주 한 병 정도? 최근에는 와인에 꼽혀서 와인 한 병씩으로 혼술을 하는 편이다. 엄밀히는 삼남매 중에 누구라도 한 녀석쯤은 끼일테니 온전한 혼술은 아니긴 하지만 술을 먹는 어른이 나뿐인 자리를 집에서 자주 가진다. 하지만, 이런 외부 영업장에서의 혼자 술마시기는 45년만에 처음인 것 같으다. 초반의 혼자라는 뻘줌함을 이겨내니 이렇게 편하고 좋을수가.  

더우기 나의 첫 혼술의 장소가 이렇게 예쁘다.


맥주 한 잔을 들이키고는 한참을 창 밖을 내다보았다. 침 가게 안밖에는 흥겨우면서도 시끄럽지 않은 딱 좋은 팝음악이 흘러 나온다. 너무 좋아서 무슨 곡인지 물어보고 싶은 것을 꾹 참는다. 시원한 맥주와 물을 한 잔씩 번갈아 들이키며 만 보를 걷느라 붉어진 내 이마의 열기를 식히고 나니, 마당에 있는 작은 정원을 지나온 풋풋한 바람이 내 콧 속을 싱그럽게 하는 것이 느껴진다. 몸도 머리도 싱그럽다못해 아주, 그냥 싱글싱글하다. 딱 좋다. 이런 기분이라면 나의 두 술친구에게 바람을 맞아도, 기분좋게 어두워지는 이 길을 다시 나서서 집으로 돌아가도 억울하지도 않을 것 같다. 얼 먹을지 천천히 메뉴판을 들여다보며 두 친구를 다리는 일 나쁘지 않다. 


온전히 나 혼자인 시간. 이런 시간을 나는 왜 처음으로 가져본 걸까. 나는 왜 온전히 나 혼자인 이런 시간을 즐기지 못 하고 청승맞아 보일까 봐, 겁부터 먹었을까.

술꾼 도시 아주미라는 타이틀을 반납해야 할까부다. 술은 꽤나 먹고 다닌다 싶었는데, 나를 돌아다보고 나에게만 집중해보는 진정한 혼술은 한번도 시도해보지 못한 내가 술꾼이라니. 끄럽다.

어디가서 나이 언급하기 쑥쓰러울만큼 세월을 살아내었다 싶었는데, 이렇게 혼자서 하는 일이 어설프고, 혼자서 안 해본 일들 투성이인 내 인생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하며 내 술친구들을 기다려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해 본 일보다 안 해본 일이 더 많은 인생이다. 새로운 일에 도전해 보는 것이 유행이라는 요즘이지만, 남들이 하는 거창한 유행말고 진짜로 내가 하고싶은 일들, 놓치고 넘어가버린 안 해본 일들이 무엇인지 하나씩 찾아나서야 겠다. 

사실 혼자하는 일들은 거의가 안 해본 일의 범주우물한 개구리같은 인생이다. 45살 나에게 이제서야 홀로서기의 온전한 즐거움을 누리게 해주리라.  


그로부터 딱 1시간 30분 후에 나타난 미야가

"이 동네, 처음 와 봤는데, 너무 좋다. 꼭 서울에 한남동같애. " 한다.

나는 여기, 삼덕동은 자주 와 봤지만 서울의 한남동은 한번도 가보지를 못했다. 이런 분위기라면 한남동부터 가보아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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