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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꺼억 Jul 03. 2022

죽음을 추억합니다

#5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일본 사람들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하셨다. 시골에서 호롱불 피우고 공부할 때 일본인들은 벌써 전국 곳곳에 전깃불을 보급했다고 하시면서다. 일본인들이 시키면 내키든 내키지 않든 일단 따르는 게 순리라고 하셨다. 반항하지 말라고 하셨다. 장교 시절 일반전초(GOP)에서 근무하느라 장례식에는 찾아뵙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인 줄 아는 온전치 못한 정신으로도 외손주 걱정하며 하신 말씀으로 생각한다.


외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지내셨던 안동 정산리 일대는 경북지역 치고는 산골인지라 눈이 자주 왔다. 날도 추워 논바닥이 얼곤 했는데, 논 위에서 탔던 썰매는 그렇게도 재미가 있었다. 서울시청광장 아이스링크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오히려 더 생각나는 쪽은 정산리 논바닥이다. 시간이 지나면 나쁜 기억도 좋은 기억이 되듯, 주변에는 산과 눈밖에 없던 그 시절 그 풍경이 지금의 도시 불빛들보다 더 강렬하게 느껴지곤 한다.


썰매를 손수 만드는 과정도 좋았다. 적당한 크기의 나무합판 아래에 기다란 쇳조각을 못으로 덧댔다. 긴 나무 막대기 끄트머리로는 못 머리가 박히게끔 망치질로 고정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썰매를 갖고 외할아버지가 "시겟또(스케이트) 타러 가자"고 하면 신이 났다. 점심시간이 지난 줄도 모르고 타다 보면 언덕 너머에서 외할머니가 "밥 먹으러 집에 들어오라"고 소리치며 손짓하던 장면이 어렴풋하게나마 머릿속에 남아 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GOP 지휘통제실 안에서 전화로 전해 들었다. 당시 북한군이 무인정찰기를 한창 남쪽으로 날리고 있어 개인적인 전화를 받는 것조차 눈치가 보였던 때다. 간신히 받은 전화 너머로 어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딱히 떨리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바빠서 못 올 것 같으면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였다.


전역한 뒤 무덤 앞에 섰다. 경작하시던 과수원 쪽으로 올라가는 산길 능선에 마련된 소박한 무덤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로도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가 보지는 못한 것 같다. 맥주를 즐겨 드셨고, 초밥을 그렇게도 좋아하셨다. 한문을 잘 아셔서 동내 어린 학생들을 상대로 서예를 가르치는 학당도 운영하셨던 걸로 안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 길이 없다. 하지만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다. 최근에는 기억에 의존해 누군가를 추억하는 빈도가 잦아졌다. 나이가 들수록 자연스러운 일이리라. 오늘은 죽음을 추억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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