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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이령 Sep 04. 2024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방식

2024학년도 9월 1학년 학력평가



  비본래적 삶에서 해방되어 본래적 삶으로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해 하이데거는 삶이 유한하다는 인식, 즉 죽음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하이데거에게 죽음은 현존재가 반드시 맞이하게 된다는 점에서 확실성을 가지며, 삶의 일부분으로서 '아직 오지 않음'의 상태로 존재한다. 다시 말해, 죽음은 현존재 외부에 있는 사건이 아니라 현존재 자체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또한 죽음은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 줄 수 없는, '나' 스스로만이 경험할 수 있는 고유한 것이기에 대체불가능성을 지닌다. 따라서 죽음이야말로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나'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며, '나'의 죽음을 적극적으로 대면할 때 자신의 진정한 개인적 삶을 인식하고 본래적 삶을 살아가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죽음을 적극적으로 대면하지 않고 단순히 '나'가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그칠 때는 본래적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현존재는 불안을 느끼게 되고,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를 세인으로 전락시켜 자신의 죽음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타인의 죽음을 보면서도 자신의 고유한 죽음에 대해서는 잘 실감하지 못하고, 오히려 죽음이 자신과는 무관한 사건이라고 외면하며 죽음의 확실성을 부정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한 이러한 회피와 무관심이 현존재를 자신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삶의 변화를 위해, 죽음이 주는 불안으로부터 달아나지 않고 죽음을 대면하여 선취할 것을 요구하였다.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죽음이라는 가능성 앞에 미리 자신을 세워봄으로써 과거의 비본래적 삶을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관점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스스로 결정하며 살아가겠다는 새로운 결단을 통한 실존적 삶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죽는 순간의 고통 때문이 아니라 더이상 삶이 지속될 수 없다는 절망감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으며 이름을 부를 수도 없다. 즐겨 먹던 음식을 먹을 수도 없고 그 음식을 함께 들던 가족들과 더이상 함께할 수도 없다. 일하는 것의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없고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떨 수 없고 함께 긴 밤을 새울 수도 없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죽음은 그야말로 모든 것의 결렬, 모든 것과의 결별을 뜻하기 때문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죽는다. 죽음은 확실성의 사건으로서 우리 삶에, 우리 존재에 내재되어 있다. 흔히 인간은 가능성이라는 말로 대체되기도 한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인간의 존재 가치에 대하여 회의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회의는 인간의 본래적 가능성에 의해 다시 무화되기도 한다. 그 가능성의 본원이 삶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죽음에 의한 것이라면 어떨까.  

  어느 누구도 어떤 존재자의 죽음을 대신할 수 없다. 죽음이야말로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나'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 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나'가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인식)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맞서고 죽음을 '선취'하는 것이 필요하다. 

  죽음이라는 삶의 형식을 수용한 상태에서 죽음이라는 가능성과 '나'의 현재를 비견하고 본래적이지 않았던 세인(世人)으로서의 삶을 반성함으로써 우리는 모두 우리 모두의 존재 의미를 스스로 결정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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