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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e Nov 06. 2023

크리스마스에 꾼 꿈, 돌아온 백패커

2016.12.25.


 사람들이 둘러앉았던 탁자와 의자가 정리되고 사회자 한 분이 안내 말씀을 하며 식사장소는 곧 크리스마스 파티의 정점인 선물교환식 장소로 변모했다. 바깥에서 뛰어놀던 아이들도 정리된 공간으로 들어와 삼삼오오 몰려 앉기 시작했고, 그새를 못 참고 엄마 아빠를 찾는 아이, 동생을 달래는 누나, 형까지. 여태까지 <나 홀로 집에>와 함께 했던 내 성탄절에서는 볼 수 없던 풍경에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아이들의 순수한 모습에 내 마음도 덩달아 따뜻해지는 거 같았다.

 선물교환식의 기본 룰은 하나다. 한번 터치한 선물은 그 사람이 가져가는 것. 먼저 아이들의 선물교환식이 시작됐다. 아이를 위한 선물을 코 앞 탁자 위에 올려 두고서 고르라고 했지만, 손 끝하나 닿지 않고 그 앞에서 털썩 주저앉더니 엄마를 찾아가서 되려 선물을 갖다 주는 웃지 못할 상황이 펼쳐지기도 했다. 아이들의 선물은 대부분 장난감, 인형, 학용품 등등이었는데, 나중에는 부모님들끼리 선물을 서로 바꾸는 모습에 아이들이 필요한 걸 가져가시는구나 싶었다.



 다음은 어른들의 선물 교환식. 열심히 손뼉 치고 호응하며 파티 자체에 스며들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왠지 가시방석에 앉은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목을 끈 건 먼저 선물을 받아간 분 중에는 무려 $100달러짜리 상품권을 타가시는 게 아닌가? 혹시라도 내가 고른 상자에 고가품이 들어가 있다면, 아무리 운이라고 해도 생판 처음 본 이방인이 와서 그러는 건 또 예의가 아닌 거 같고…, 아직 고가품이 걸린 것도 아닌데 어떡하나 하고 걱정이 앞섰다. 사실 간단한 해결책은 내가 두었던 핸드크림 상자를 도로 가져오면 될 일이었지만, 겉으로 말은 걱정한다고 해놓고서도 속마음은 '그래도..' 하며 욕심으로 들어차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것이다. 선물 종류는 다양했다. 찻잔 세트, 티백, 향초, 캠핑용 의자, 고가의 화장품 등등.. 이것만 알아두어도 앞으로 마니또용 선물 살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98번! 98번 어디 계시죠? 나오세요-!


 50번부터 시작해서 벌써 내가 받은 98번까지 다다르게 됐다. 앞의 사람들이 한 것처럼 간단한 자기소개와 인사를 한 뒤 운명의 수납장 앞으로 다가섰다. 고민을 하고 싶어도 이미 지체된 행사에 누를 끼칠 수도 없고, 단숨에 낚아채려고 나가면서 선물 사이를 훑어봤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마음속으로 되뇌다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작고 요염한 상자 하나가 보였다. 속으로 쾌제를 부르며 손을 뻗어 상자를 단숨에 낚아챘다.


'이거다!'

 앞의 걱정이 무안할 정도로 고르기가 쉬웠는데, 다른 상자는 포장지로 감싸져 있었지만, 내가 고른 상자는 포장이 안되어 있어서 겉으로도 '나 선크림이오'하고 상표가 다 보였다. 안 그래도 전날 쿠지 비치를 갔다가 시뻘겋게 탄 팔등을 보며 선크림 하나 구해야겠다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이렇게 하나 또 얻었다. 선물을 들고 싱글벙글한 모습에 0호씨가 "선크림이네요!'하고 함께 호응해 주었다.

 번호표 끝번까지 돌고 나니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선물 하나씩이 돌아가며 행사가 끝이 났다. 각자 집에 가기 전에 장소 정리가 시작됐는데, 나이 지긋해 보이시는 남자분께서 등에 매는 청소기를 매고서 순식간에 집안 이곳저곳을 누비시며 청소를 하시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보자마자 '저분은 청소 전문가 시겠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다른 사람에게 미룰 수도 있을 텐데 맡은 바 소임을 다하시는 모습이 멋져서 나도 본받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모든 뒷정리까지 끝나고, 사람들은 또 삼삼오오 모여서 각자 집으로 향했다.

 오기 전에 그렇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낸 게 너무 신기했다. 한 손에는 선크림 새것이, 다른 한 손에는 보기에 몇십 불은 족히 나가 보이는 마카롱 한 상자를 들고 J호씨 차에 탔다. 역시나 내 걱정과는 달리, 0호씨가 센트럴 역까지 바래다준다고 해서 금방 백패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백패커에 돌아오니 한국 여행사 마크가 찍힌 슬리퍼 두 쌍과 비어있던 세 침상 모두 자리가 들어찬 모습이었다. '한국사람도 오고 방도 다 찼구나' 생각하는데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약간 남미풍의 모습의 남자가 밝은 모습으로 인사를 건넸다. 이 친구의 이름은 Mariano, 칠레 출신이었고, 뉴질랜드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연말 시즌에 맞춰 홀리데이를 가진다고 했다. 약간의 통성명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방송으로 오늘은 'Free hotdog day'라며 입구 쪽 스태프에게 가면 핫도그를 공짜로 준다고 했다. 그제야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벌써부터 공짜 핫도그를 기다리는 줄이 인산인해였다. 둘 다 출출하기도 하고 공짜 핫도그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으니 바로 나가서 줄 뒤에 섰다. 조금씩 조금씩 핫도그 가판에 가까워지는데 저 멀리 뒤쪽에 한국인으로 보이는 아저씨와 청년 한 명이 보였다. 나중에 방에 들어가서 있다 보니 그분들이 아까 슬리퍼의 주인공이자 우리 방의 새로운 룸메이트였다.


'Free Hotdog day!', 녀석들.. 빵이라도 찐 핫도그빵에 담아주지 하고 못내 아쉬웠던...


 핫도그를 해치우고 샤워를 하고서 방침대에 드러누웠다. 그제야 크리스마스에 켠 내 성냥불이 꺼진 걸 느꼈다. 만찬과 화기애애한 장면은 모두 사라지고 눈앞에는 까만 이층 침대 바닥만 보였으니 말이다. 정말 거짓말 같은 하루를 보내고 나니 어안이 벙벙했다.

 처음 겪어본 호주에서의 크리스마스 모임, 한국에서도 겪어본 적 없던 지라 더 신기했다. 끈끈하게 이어지고 있는 한인사회의 모습의 일부분이나마 느낄 수 있었던 게 감사했고, 특히 워홀을 가게 되면 '한국 사람을 더 조심해!'라는 조언을 많이 듣게 되는데, 걔 중에는 좋은 분도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물론 단편적인 모습으로 모든 걸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여태까지 아예 시도조차 안 했을 것을 시도라도 해본 게 내 경험의 확장이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편견 가득했던 내가 '사람은 역시 겪어봐야 아는구나'하고 조그마한 여지를 남기게 되었는데, 이게 앞으로 득이 될지 독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무언가 시도할 때 덜 머뭇거리고 조금 더 달려들 수 있게 된 거 같았다.



 환상 같은 하루가 끝나가니 다시금 마음속에 숨어있던 고민들이 눈앞으로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잠은 안 오지만 눈을 질끈 감고 잠을 청했다. 오늘 나도 모르게 켠 환상의 성냥불이 호주에서의 마지막 성냥불이 아니길 바라며, 슬픈 결말을 가진 <성냥팔이소녀>의 이야기가 내 버전에서는 해피엔딩이길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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