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27.
주영씨! 방 구하셨어요???
반가운 인사도 잠시, 주호 씨의 질문이 들어왔다. 일전에 여성 두 분이 인스펙션 온다고 하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아마 변동사항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다음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는데.
저희가 많이 생각해 봤는데…, 주영씨랑 한번 같이 살아보고 싶어서요. 예전에 저희 워홀 할 때 생각나기도 하고요. 주영씨가 나이도 있고 하시니 완전 어린 친구들 하고는 조금 다를 수밖에 없으니 이것저것 더 생각이 나더라고요. 물론! 부담 가지지는 마시고요. 연말이라 비행기표도 비쌀 텐데 단기로 짧게 지내셔도 괜찮으니까 한번 생각해 보시면 어떨까 해서요!
정말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순간 멍해지고 말았다. 잠깐 동안의 인연이지만 주호 씨 부부와 함께라면 조금 살만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으니 말이다. 나이대도 비슷하고 이미 워홀을 겪어본 이와 함께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앞으로 호주 생활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싼 주거비와 미니멈 스테이 때문에 시드니에 더 머무는 게 힘들었는데 그것마저 해소해 주었으니 고민을 안 하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다만 크리스마스-뉴이어 홀리데이 시즌에 세 배는 오른 비행기 표값이 부담되어, 예약할 때 조금 더 싸긴 하지만 환불과 변경이 안 되는 표를 산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말 그대로 포기하면 그 돈은 고스란히 날리는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제안은 감사하지만 어쩔 수 없을 것 같다는 인사를 전하려는데 주호 씨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또한 말문이 막히고 혼란스러워졌다. 바로 일자리를 소개받게 된 것이다.
실은..
전화드린 것도 내일 면접 볼 수 있을지 여쭤보려 했거든요..
아뿔싸!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일자리 소개라니…!?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주호 씨 부부가 크리스마스 파티 이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교회에서 알고 지내던 한인 사장님들께 일자리를 여쭤보았고, 어떻게 일이 잘 풀려 면접만 보면 거의 확실한 자리를 소개받았다고 한다. 조건도 내가 찾아본 것과 비교가 안 되는 시급 $19불, 쉬프트(Shift, 근로시간)도 풀타임에 준하는 37.5시간 정도를 보장한다고 했다. 하는 일은 주로 식자재 창고에서 차량까지 딜리버리(Delivery)이고, 주호 씨도 호주에서 처음 정착할 때 했던 일이라고 했다. 물론 브리즈번행을 결정했던 뽑아줄지 안 뽑아줄지 모를 공장 시급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었지만, 대부분의 구인 공고에 최저시급도 미치지 못하는 광고가 수두룩한 현실에 19불 정도면 시드니에서 이력서 한 장 못 돌려본 나로서는 과분할 정도로 감지덕지한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식간에 여러 생각이 스치고 겹치고 튀어나왔지만 세 단어는 좀 더 뚜렷해짐이 느껴졌다.
왜, 하필, 지금
진짜 고민고민하다가 오늘 예매한 건데…, 기왕이면 비행기 예매 전에 전화를 받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처럼 결정장애를 넘어서서 정한 것이었는데, 갑자기 선택지가 늘고 나니 앞서 결심도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 야밤에 계속 전화기만 붙잡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과 함께 다시 한번 감사인사를 전했다. 주호 씨도 일전에 지역이동을 고민한다고는 들었으나 이렇게 바로 떠날지는 생각도 못했다며, 당장 표값이 아깝게 느껴지더라도 일을 시작하고 나면 금세 메꿔질 테니 잘 생각해 보라는 말을 해줬다. 결정은 오롯이 나의 몫이긴 하지만,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한 입장이다 보니 말을 전하려면 되도록 빨리 해야 하므로 30분 내로 의사표현을 해달라는 당부 또한 남겼다.
여태까지 겪어본 일이나 해본 고민이라면 어떻게든 혼자서 해봤겠지만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호주를 모르는 한국 친구에게도 물어보고, 워홀을 해본 친구들, 호주에 살고 있는 친구들, 여럿에게 조언을 구하다가 브리즈번에 동산이에게 연락을 했다.
동산아 나 어떡하니...?
브리즈번행을 정하고 스스로 뿌듯해하면서도 아직 숙소조차 잡지 않은 내게, 정신을 바짝 차릴 것과 함께 단기 셰어도 알아봐 줄 정도로 고맙고 현실적인 친구이기에 이 문제 또한 동산이의 말이라면 그대로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동산이는 자신의 생각을 말해줬다. 일단 합격여부조차 불확실한 공장을 위해 지역이동을 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안정된 상태에서 초기 호주 생활 적응을 해보는 건 어떻겠냐는 이야기를 해줬다. 틀린 말이 없었다. 그간 고민 또한 불확실성, 정해지지 않은 것에 너무 많은 비용과 시간을 쓰게 될지도 모르는 게 가장 큰 리스크였으니 말이다. 고 시급 닭공장에 서류 접수한 것은 맞지만, 아직 1차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밀어붙이는 게 조금은 무모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Job에 대한 이야기도 해줬는데, 완전 최고 좋은 잡은 아니더라도 최저시급은 쳐준다는 말이니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너무 'Yes or No'에만 빠져있지 말고, 제3안으로 일단 면접은 보면서 구체적인 조건을 확인해 보고, 괜찮으면 그때 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해줬다. 나는 소개받았으니 무조건 하는 게 도리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동산이의 조언을 듣고 나니 확실히 생각이 넓혀졌다. 동산이를 비롯한 여러 친구들에게 조언을 들었는데, 좀처럼 내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지는 않았다. 삼십 분이 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마음을 정했는지 오화를 하러 백패커 밖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보세요?!
주호 씨 고마워요.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요...
백패커 입구 쪽엔 여전히 우퍼 스피커와 알 수 없는 힙합을 듣는 녀석들이 그대로 있었고, 카운터며 식당 안도 시끌벅적한 인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만 심각하고 나머지 세상은 모두 신나 보이는 이곳, 다시 고개를 돌려 밖으로 나와서 주호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신음이 들려올 동안 잠시 밤하늘을 바라봤는데 희한하게도 그제야 마음이 한쪽으로 기운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솔직하게 내 마음을 이야기했다. 이번 기회는 아쉽지만 'No', 브리즈번행을 선택하기로 했다.
적어도 이번만큼은 내가 정한 대로 마무리 짓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결정적 순간이나 이유를 묻는다면 나 또한 분명하게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내 마음을 정했고, 이제는 돌아보지 않을 이유를 떠올린다는 점이었다. 어설프게 걸쳐있는 게 아니라 하나를 끝내고 하나를 시작하는 것, 이토록 단순한 진리를 나는 호주에 오고 나서야 조금씩 실현해 나가고 있냐는 생각에 조금 부끄럽기도 하면서도 내심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비록 이 진리에 빠르게 도달하진 못했지만, 누군가 그러지 않았던가?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고.
지금의 내 선택이 조금 더 나은 길로 인도할지, 아니면 더 어려운 길로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미래를 알 수 없는 대신 우리는 우리 마음에 기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선택도 항상 마음이 먼저고, 이유는 그다음이 아니었던가 하고서 말이다.
나의 영어, 스피치 멘토 선생님의 결정이 고민될 때 도움이 될 이야기가 떠올랐다. 선택의 순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어떤 것이 더 좋은 선택인가 보다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되든 무엇을 더 감수하고 책임질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그 이야기. 생각과 고민이 새로운 목표에 다다르자 잠시동안의 고민들은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순식간에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돌아보지 않을 이유, 이제는 정말 그것에만 집중할 시간이 되었음을 느꼈다. 일주일의 끝자락, 마지막 밤이 아니다. 새로운 밤, 새로운 아침.
표지이미지 출처: 사진: Unsplash의Robert Stum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