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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그흐 Apr 28. 2023

[한국의 신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가치

함경도와 제주도와 창세신화

옛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할 때가 있다.

값비싼 종이에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사람 말고. 끝없이 일하며 남의 이야기에 자신의 말을 한 숟갈 얹으며 "그래 그래 삶이 그런 거지"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말이다.

가난의 설움, 고된 시집살이와 일만 하다 늙어버린 야속한 세월을 노래하던 사람들. 그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삶을, 더 나아가서는 그렇게 생겨먹은 세상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필자는 그 사람들이 바라보던 세상을 신화를 통해서 한 번 이야기해보고자 한다.『삼국유사』에 실린 신화들 말고, 민초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 20세기에 와서야 기록된 서사무가로 말이다.

이 글에서는 이 세상이 만들어진 과정을 노래하는 창세신화를 한 번 뜯어보려 한다. 그중에서도 우리는 함경도에서 전승된 <창세가>와 제주도에서 전해지는 <천지왕본풀이>를 이야기해 보자.


한국이라는 곳에서 왜 여러 개의 창세 신화가 전해지는지 혹시 궁금하는 사람도 있을 테다.

그렇다면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여러분의 지역에서 트램펄린 위에서 뛰어노는 것을 무엇이라 불렀는가?

방방, 퐁퐁, 콩콩 등등 성장한 지역에 따라 다른 답을 내어놓을 것이다. 그 외에도 손바닥을 뒤집어 같은 편을 정할 때에 부르는 노래도 각기 다를 것이다.

그런 것처럼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들은 지역에 따라 내용도 인물도 조금씩 다르다. 신화도 그렇다.


자, 그럼 이제 신화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하늘과 땅이 분리된 후
신은 해와 달이 하나만 남도록 조정하고,
물과 불을 발견한 다음 은쟁반과 금쟁반에 은벌레와 금벌레를 받으니
그 벌레들이 각각 여자와 남자가 되었다.
-함경도 <창세가>


이 세상이 어떻게 생겨났을까. 사람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이 세상을 만드는 것에 있어 이 두 질문이 핵심일 것 같지만 흥미롭게도 한국의 창세신화에서 여기에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창세가>에서는 아주 간략하게 이야기할 뿐이고, <천지왕본풀이>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바로 "이 세상의 질서"가 어떻게 생겨났는가이다.


어느 날 인간 세상을 다스리던 미륵에게 석가가 찾아와 말한다.
"우리 인간 세상을 누가 다스릴까를 두고 한 번 겨루어봅시다."
두 신은 꽃을 피우는 사람이 인간 세상을 차지하기로 정하고 꽃 피우기 내기를 한 판 벌인다.
미륵은 꽃을 활짝 피운다.
그러자 꽃을 피우지 못한 석가는 그 꽃을 몰래 가져와 자신의 꽃인척 한다.
그걸 알아챈 미륵은 상대의 욕심에 질려버렸는지 인간 세상은 그냥 네가 다스려라 하고는 떠난다.


<천지왕본풀이> 속 대별왕과 소별왕이라는 신도 신도 똑같은 일을 벌인다.

참 이상하지 않은가. 인간 세상은 왜 욕심만 많고 꽃도 피우지 못한 무능력하고 비열한 존재가 다스리는 걸까? 지도자의 가치관에 따라 한 국가의 운영이 달라지듯, 인간 세계의 질서 또한 비열한 신에 의해 굴러갈 텐데 말이다.


혹자는 이 이야길 통해 인간 세상이 평온해지기 위해서는 정직하고 용감하면서도 지혜로운 통치자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도 말한다. 그런데 이 말엔 어쩐지 가자미눈을 뜨고 보게 된다. 민초들이 원한다고 이승을 차지한 신을 바꿀 수 있나? 한 나라의 임금도 민초들만의 봉기로 뒤바꾸긴 어려운데, 유능한 통치자의 상을 교훈 삼기 위해 굳이 신화를 전하고 또 전했을까 싶은 것이다.


여기서 하나 우리가 생각해 볼 점이 있다. 이 신화가 의례에서 언제 불렸는가이다. 바로 의례의 시작부이다.

사람들은 지금의 삶이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신에게 의례를 올렸다. 부정한 기운은 없애고, 복을 불러와 앞으로의 날들은 지금보다는 좋은 날들 이기를 기도했다.

그러한 의례의 시작부에서 창세신화를 노래로 불렀던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창세신화의 의미는 이렇게도 볼 수 있다.

'그래 네가 힘든 거, 너에게 자꾸만 힘든 일이 찾아오는 거 그거 네 탓 아니다. 다 이 세상이 이상하게 생겨 먹어서 그런 거야. 이 세상은 만들어질 때부터 그랬어. 그리고 그 신이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데 네게 힘든 일이 일어나는 것도 당연해.

그런데 우리 행복하고 싶잖아. 더 편안하게 살고 싶잖아. 그러니까 우리 한 번 신들에게 간곡히 청해보자. 부정한 것을 물리고 행복을 빌어달라고.'


산다는 것이 행복이면 좋겠는데. 살다 보면 꼭 인생이 고통의 연속같이 느껴지는 날들이 있다. 고등학교 땐 대학에 가면, 대학생 땐 취업을 하면, 또 그다음에 언젠가가 찾아오면 행복할 거라고 믿곤 한다. 그런데 인생에 고난과 역경은 끝없이 찾아온다. 무언갈 넘기면 그다음이 오고, 오고 또 오고.

그래서일까 '이 세상이 이렇게 생겨 먹은 거'라고 인정하는 태도는 오히려 위안이 되곤 한다. 그러면 지금 내 눈앞에 닥친 새로운 고난을 조금 더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이것이 왜 내게 찾아왔는지, 내 삶은 왜 이렇게 힘든지를 곱씹으며 괴로워하기보단 이번 역경을 조금 더 잘 넘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게 되니까. 내가 뭘 하든 또 힘들 텐데 무슨 의미가 있냐며 허무주의에 빠질 수도 있겠으나 행복해지고 싶단 의지가 있다면 지금을 인정하고 일어설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엄마들의 "지겨워~지겨워~"란 마법의 말처럼.


정성과 돈을 들여 의례를 올리던 사람들도 비슷한 마음이지 않았을까. 가족이 아프고, 다치고, 죽고, 뭘 해도 잘 풀리지 않을 때. "세상이 이렇게 생겨 먹어서 힘든 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조금 더 좋아지길 기도해 보자"와 같은 태도는 나에게 닥친 고난을 의연하게 받아들이게 하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준다는 데서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힘든 일이 없을 순 없다. 세상이 이렇게 생겨먹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살아내 보자. 가능하다면 행복을 빌면서.

필자는 이것이 민초들이 세상을 바라보던 시각이 아니었을까 한다.

끊임없는 일과 나아지지 않는 살림살이 속에 하루하루를 견뎌내던 그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은 큰 힘이 되었을 거라 감히 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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