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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그흐 May 02. 2023

[한국의 신화] 우리랑 상관없는 옛이야기라고요?

바리데기 혹은 바리공주

한국의 신화를 모티브로 한 콘텐츠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흥미롭게도 점점 신화의 플롯보다는 인물이나 세계관만 가져오는 사례가 많아졌다. 웹툰 <쌍갑포차>가 저승관을, 드라마 <도깨비>가 저승사자, 삼신할머니 등등을 차용한 것처럼.

한편 교육 현장에서 한국의 신화는 위기에 처했다. 가부장제나 효와 같은 가치관을 듬뿍 담은 탓에 이야기의 맛을 음미하기도 전에 학생들은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질문한다. "이런 이상한 얘기를 왜 배워야 해요?"


위의 두 사례가 별개의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다. 신화에 담긴 구닥다리 가치관이 지금의 우리와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곤 외친다 "신화는 우리랑 상관없는 옛이야기"라고.


이 논란의 중심엔 <바리데기>가 있다.


금기를 어기고 혼인한 탓에 왕가에는 딸만 여섯 명이 태어났다.
이번에는 왕자이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속에 일곱째가 태어났고
또 딸이었다.
분개한 왕은 일곱째를 가져다 버린다.


딸이라는 이유로 버려진 아이. 그래서 이름도 '버리다'는 뜻을 품은 '바리데기'다. 혹자는 그를 '바리공주'라고도 부른다. 공주였으니까. 그리고 신이 되는 존재이니 그를 높이기 위해서.

이 글에서는 부모의 만행에 주목하고자 하므로 바리데기라고 부르겠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부모의 언행은 가관이다.

그리고 그런 부모를 포용하는 바리데기를 이해하는 것은 더욱더 어렵다.


이후 죽을병에 걸린 왕은 저승에 있는 약수를 먹어야만 살 수 있다.
왕은 여섯 딸에게 약을 구하러 다녀와달라 부탁하나 모두 거절한다.
왕비는 바리데기를 찾아가 약을 구해달라고 부탁하고
바리데기는 약을 구하러 저승으로 떠난다.


딸이라는 이유로 자기를 버린 부모를 위해 저승에 간다고? 게다가 저승에서는 약을 얻는 대가로 고된 노동은 물론이고 무장승의 애도 낳아준다고? 만약 내 친구가 바리데기였다면 하고 상상해 보면, 웹툰 <바리공주>의 연재가 시작될 당시 "바리데기는 효녀가 아니고 호구"라고 말하며 욕하던 네티즌처럼 친구의 등짝을 때렸을 거다.

여하튼 갖은 고생 끝에 약수를 구한 바리데기는 부모를 살리고 죽은 사람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신이 된다.


자식을 버린 부모가 '효'를 요구하고 그렇다고 또 '효도'하는 <바리데기>의 이야기가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옛이야기' 취급을 당하는 것이 일견 이해가 간다.


자 그렇다면 바리데기를 '아이'로 바꾸어 질문을 던져보자.

부모가 아이를 버리는 일, 아이가 그런 부모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정말 지금의 우리랑 상관없는 옛날이야기인가?

머릿속에 지난 일 년간 보았던 뉴스들이 떠오르지 않는가?


자 그럼 지금부터는 바리데기를 먼 옛날의 사람이 아닌 지금의 우리 곁에 살고 있는 연약한 아이라고 상상해 보자.


"못 가겠소 못 가겠소.
여름이면 더워 죽으라고 솜이불 덮어서 양지에 두고
겨울이면 얼어 죽으라고 삼베이불 덮어 음지에 두고
나도 못 가겠소"


전라도본에서 바리데기는 자신에게 부모가 저지른 폭력을 읊으며 못 가겠다고 말한다. 이것은 부모에 대한 설움과 분노의 목소리다.

부모는 어떻게 했을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사죄하고 빌었을까? 그럴 리가. 기가 막혀하며 뒤돌아선다.


바리데기도 안다. 자신이 당한 것이 폭력이라는 걸. 그리고 부모를 원망한다.

그러나 결국 사죄조차 하지 않는 부모의 뜻을 따라 저승에 간다.


왜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가족이 너무 중요한 사회였으니까.

부모가 있고,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당연하고 '정상'이었으니까. 고된 시집살이와 가정폭력 속에서도 이혼이란 선택지 없이 견뎠던 수많은 부인들처럼, 아이들 또한 그 부모가 어떻든 그 아래에서 참고 살아야만 했다. '아이는 부모의 손에 자라야하니까', '남의 집 일이니까' 무엇보다 응당 '아이에게는 부모가 필요하니까'

이러한 시선 속에서 바리데기는 그들이 자신을 딸로 인정해 주기를, 가족으로서 품어주기를 기대하며 부모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바리데기에게 최선은 가족이 되는 것이었다.


아이는 부모 손에서 자라야 하고, 아이에게는 부모가 필요하다는 인식은 제도를 통해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여러 차례의 신고가 있었음에도 기관의 미온적 대응으로 인해 결국 아이가 사망한 사건, 형제자매가 학대로 사망한 후에도 부모와 아이의 분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결국 또 다른 아이가 목숨을 잃는 사건 등등. 아이들이 가정에 남겨지는 일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고, 그 아이들은 바리데기처럼 부모에게 순응하고 사랑을 바란다.



우리 옛이야기를 읽는 자세를 조금 바꾸어보자.

옛날에 만들어지고, 오래 전승되었다고 해서 교훈을 담고 있을 거라 기대하지 말자.

대신 가늠해 보는 것이다. 이 이야기와 우리 사이의 거리를. 지금의 우리와 얼마나 같고 다른가.

옛사람이 얻던 이야기의 힘이 지금의 우리에게도 유효한가를.


<바리데기>가 굿판에서 불릴 때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굿의 하이라이트였다.

사람들은 바리데기의 갖은 고생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고 서로를 토닥였다.


"맞아 맞아 우리 부모도 그랬지. 맞아 맞아 우리네 삶이 이렇게나 힘들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지. 그래도 우리 살아냈지. 그 모든 걸 견뎌왔지."


굿판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바리데기의 고난은 자신의 고난이기도 했다.

그래서 공감하며 위안을 받았다.


필자도 바리데기의 결말이 해피엔딩이라거나 모범적인 답안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바리데기의 삶 속 고난은 여전히 나 혹은 우리 곁의 누군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는 굿판의 사람들처럼 바리데기의 이야기가 공감에서 비롯한 위안의 서사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바리데기와 울음과 의지에서 의미를 발견해 보자. 그리고 우리 곁의 사람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자.


이것이 우리와 상관없는 옛이야기가 되면 좋겠다고.




*본 글은 필자의 논문 「<바리데기> 속 폭력의 양상과 그 현대적 의미」를 기반으로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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