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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으그흐 Jan 24. 2024

숨죽여 벨소리를 기다리던 날들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며

저는 요즘 대학교 입학을 앞두었던 2월의 추운 날들이 떠오르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전화를 기다리고 있거든요. 언제 올지, 오기는 할지 그 무엇도 알 수 없는 기약 없는 전화를요.


저는 재수를 했습니다. 전혀 계획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모든 대학에서 떨어졌지 뭐예요.


혼자 서울로 올라와 1.5평짜리 방에서 지내며 정말 열심히 공부했어요.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예습을 하고, 하루종일 수업을 듣고 자습을 하고 자기 전에는 운동을 겸하여 108배를 했죠.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요.

성적은 쭉쭉 오르는 듯했습니다. 그러다 9월 즈음부터였을까요. 재수 생활이 조금씩 힘에 부치더니 성적은 조금씩 요동쳤습니다. 다행히 수능에서 고등학교 3학년 때보다는 더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대입의 길은 녹록지 않았어요.

아버지의 꿈이었던 대학은 1차에서 낙방. 또 다른 대학은 대기번호를, 재수를 하지 않아도 되었을 학교에서는 합격장을 받았습니다. 매일 같이 마음속 목소리들에 시달렸어요.


야 걔 재수해서 겨우 거기 갔대.


스스로 만들어낸 환청이란 걸 알면서도 떨치지 못해 눈물만 흘렸습니다. 그땐 좋은 대학에 가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삶이 망해버릴 것만 같았거든요. (지금에서는 모두 다 쓸데없는 생각이었다는 걸 알지만 그땐 그랬어요.)


영화 <카모메 식당>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카모메 식당』을 틀어두면 그나마 울지 않을 수 있어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영화를 봤습니다. 자세한 사정은 이야기하지 않아도 사연이 있는 세 사람이 우연히 헬싱키에서 만나 삶을 나누는 모습이 평안함을 가져다주었거든요. 그래서 같은 영화를 수십 번 보았어요.

그런 딸을 가만히 지켜본 부모님의 심정을 가끔씩 헤아려 보곤 합니다. 나무라지 않고 조용히 저를 내버려두었던 부모님이 고맙기만 합니다.


그러다 한 커뮤니티에서 저의 앞 대기번호자가 추가 합격 전화를 받았다는 글을 본 것이 아니겠어요? 갑자기 작은 희망이 생겼습니다. 어쩌면 나에게도 전화가 올지도 몰라. 하지만 안 올지도 몰라. 이 두 생각이 하루에도 수없이 머릿속을 오갔어요.

그리고 저의 일상은 멈췄습니다. 그때 저는 헤드폰으로 밴드 음악 듣는 걸 좋아했거든요. 혹여나 음악을 듣다 전화를 못 받을까 봐. 대학 입학의 기회를 날릴까 두려워 음악도 듣지 못했어요. 초조해하며 집안 어딘가에 존재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아 나는 안되려나보다 포기했죠. 헤드폰을 쓰고 노래를 틀었습니다. 좋아하던 밴드의 CD를 넣고 크게 볼륨을 키웠어요. 일상을 되찾은 것만 같았어요.


그런데 그 순간 정말 마법같이 전화벨이 울렸고, 전화를 받았고, 대학 합격 소식을 들었습니다.

기쁨의 눈물이 차오르는 순간 때마침 외출했던 엄마가 돌아왔고, "엄마 나 합격했대"라 말하며 기쁨의 포옹을 했어요.


우연이 겹친 그 순간이 꼭 영화 같았어요.



저는 요즘 그때와 마찬가지로 전화를 한통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즘의 저는 혹시 벨소리를 못 들을까 오랜만에 벨소리를 켜두고, 어딜 가든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습니다.

마침 계절이 그래서일까요. 전화를 기다리던 그때 그날들이 많이 생각납니다.


이젠 전화가 오지 않는다고 해서 제 삶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알아요. 이것 또한 삶에서 만나는 하나의 난관일 뿐일 테고, 이걸 넘으면 또 다음 난관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만약 이걸 넘지 못한다면 또 다른 기회를 맞이할 겁니다. 영원한 성취도 영원한 슬픔도 없을 거예요. 그러니 괜찮아요.

그럼에도 내가 초조한 마음으로 전화를 기다리는 건 내가 많이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지난 나의 노력에 대한 가시적 성과가 주어지길 바라기 때문이라고. 그간 고생했다며 스스로를 다독여 봅니다.


내일부터는 조금 마음을 내려놓고 일상으로 돌아가볼까 봐요. 잠시 잊고 일상을 되찾아볼래요. 그때 같은 영화 같은 우연은 찾아올지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이제 시간이 됐어요. 이젠 일상으로 돌아가야지요. 어른이니까, 가만히 누워있다간 미래의 나에게 산더미 같은 일만 안겨주게 될 거예요. 무엇보다도 믿어요. 일상이 초조함의 수렁에서 나를 구해줄 거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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