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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이 Jun 04. 2024

14화. 신용카드를 잘랐다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 유효기간이 다 되어서 잘라본 적은 있어도, 2년 전에 세탁기 청구할인을 받아서 아직 할부금이 남은 카드를 선결제하고 해지하는 내 모습을 볼 줄은. 그렇다고 모든 신용카드를 잘라버린 건 아니다. 하지만 사용하던 신용카드 하나를 정리했다는 것은 더 이상 신용카드 위주의 삶을 살지 않겠다는 나만의 선언 같은 것이다.





외식비가 많은 부분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족은 뭘 그렇게 먹어서 돈이 모자라는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혼자 끙끙대며 식비 통제를 시작한 지 몇 달이 흐른 후 가족들과도 공유하기 시작했었다. 처음에는 '내가 만 원짜리 팥빙수도 못 시켜 먹냐'며 남편이 짜증을 내기도 하고, 그럴 때마다 만원에 이렇게 각을 세우며 살아야 하나 싶은 생각에 힘이 빠지게도 했지만 9개월에 접어들면서 예산에 맞게 소비하는 것도 제법 익숙해졌다. 결혼한 지 13년이 되어서야 우리 가족은 온전히 생활비의 한 항목을 공유하고 발을 맞추게 된 셈이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내내 남편은 밤늦게까지 일해야 하니까, 나는 혼자 독박육아 해야 하니까. 서로 누가 누가 더 힘든가 시위라도 하듯 '특별히' 식비를 아끼지 않았던 지난날들. 우리는 그렇게 보상 심리로 식비를 지출하는 생활을 했다. 생활비를 관리하던 내가 정신을 더 바짝 차리기로 결심한 후 우리 가족은 얼떨결에 나쁜 것은 덜 먹는 식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그리고 9개월 차가 되면서 예산 안에서 살아가는 것에 가족들 모두 '알고' 동의하게 됐다.










사실, 식비 통장을 분리하면서 나는 이것만 잘 관리해도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식비 통제가 익숙해진 어느 날, 아무리 노력해도 가계부의 숫자가 자꾸 마이너스 플러스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고는 다른 부분도 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부지런히 기록은 해뒀으니 그럼 주간 결산이라도 한 번 해보자 싶었다.  그런데 지출 항목이 따로 표기되어 있지 않은 가계부를 사용하고 있으니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얼마나 세세하게 나눠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마음대로 10개가 넘는 항목을 만들어서 나눴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런데 진짜 어떻게 되긴 했다. 그동안 기록을 부지런히 해서 그런지 두 달간 주간 결산을 해보니 통장을 한 두 개 정도 더 쪼개어서 예산을 잡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모자라면 이쪽저쪽 통장에서 돈을 좀 옮겨서 쓰지 하면서.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출에 대해서 한번 더 고민하게 되고, 이번 달은 신용카드 하나를 자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월 예산을 세우기 시작한 지 3개월 차. 예전에 주먹구구식으로 예산을 세웠던 적은 있지만 지금처럼 종이 위의 숫자가 아닌 실제 현금을 쪼개어서 예산 배정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자랑은 아니다;;) 6월 첫 날도 어김없이 허술한 한 달 예산표를 작성했다. 고정지출에도 조금씩 변화를 주다 보니 매달 예산을 세우면서 비고정 지출에 얼마를 쓰면 될지, 수입은 얼마나 들어오고 저축을 얼마를 할 수 있을지가 보이는 것을 보면 잘 모를 때는 계속 반복해 보면 답이 보이나 보다. 




우리 집은 여전히 지출이 많다. "SNS에서 4인 가족 한 달 식비 40만 원" 이런 제목을 보면 어나더 레벨이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하지만 작년만 해도 지출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마이너스에서 허덕이던 내 모습을 생각하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했다. 수첩으로 시작해서 모양을 갖춘 내 가계부가 뿌듯할 뿐이다. 













** 마이너스 플러스 매거진을 쓰면서 이제야 '0'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소비는 매달 일어나고, 조금 방심하면 언제든지 마이너스가 될 여지가 있기에, 플러스로 나아가기 위한 일상 속 소비 이야기로 계속 기록 남겨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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