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방자 Dec 12. 2021

[특별 여행지] 100만 번 산 고양이

고양이 캐릭터를 통해 본 삶의 의미

글 그림 사노 요코

비룡소

1977


안녕하세요, 그림책 여행자 여러분들!

오늘은 독자분들에게 추천을 받은 그림책을 여행지로 잡아보았습니다. 출판된 지 40년도 더 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고 감동을 주는 사노 요코의 <100만 번 산 고양이>입니다. 수채화로 그려진 그림은 멋진 얼룩 고양이가 100만 번이나 살아온 삶을 통해 깨달은 삶의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추천해주셨던 독자분들이 중심적으로 읽으신 고양이가 함께한 인물들과 고양이의 연관 관계, 그리고 동물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삼기를 포인트로 여행지를 탐험해 보겠습니다.



아직 이 여행지를 방문해보시지 않은 다른 독자분들을 위해 간략하게 내용을 소개해드리고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지요. <100만 번 산 고양이>에서는 '삶의 의미란 무엇일까'라는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 답은 다분히 심플합니다. 100만 번이나 죽고 살기를 반복한 얼룩 고양이는 자신이 삶의 주체가 아닌 누군가의 고양이로서 타의적 삶을 살며 죽음 또한 타의적인 이유로 죽게 됩니다. 그러다 비로소 '도둑고양이'가 되었을 때, 오롯이 자신이 자신으로서 살아가며 자신이 주인임을 무척 좋아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100만 번이나 경험한 삶에 비추어 다른 것을 하찮게 여기며 자만하지요. 그러다 자신에게 심드렁한 한 번도 죽어보지 않은 하얀 고양이를 보고 함께하기를 마음먹고 둘은 새끼를 낳고 키웁니다. 그리고 자신보다 더 좋아하는 하얀 고양이가 죽었을 때 100만 번을 울고 그 죽음 이후로는 되살아나지 않습니다. 삶을 살아온 삶의 횟수보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삶 속에서 찾은 이성애적 사랑을 삶의 중요한 가치라고 사노 요코는 얼룩 고양이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느 독자분으로부터 100만 번이나 산 고양이 삶 속에서 집어낸 왕, 뱃사공, 마술사, 도둑, 할머니, 어린 여자아이는 각각 어떤 의미가 있고 왜 하필 그들일까?라고 질문을 받았습니다. '한때 누군가의 고양이였고, 고양이는 그를 싫어하였다.'로 시작되는 문장들은 고양이가 그를 특정한 이유로 싫어하였다기보다는 종속적인 삶을 싫어했다로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의미보다 맥락적인 의미로, 타의적인 삶 속 얼룩 고양이의 삶으로 읽고 넘어가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지만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하지요. 각각의 인물에 대한 묘사를 살펴보자면 왕은 권력과 힘을 가진 삶, 뱃사공은 자유로운 삶, 마술사는 재미와 놀라움이 있는 삶, 도둑은 하층민의 삶, 할머니는 안정된 삶, 여자 어린이는 순수하지만 어리숙한 삶을 대표합니다. 처음에는 조금 더 여러 사람이 원하는 극적인 삶의 모습이고 뒤로 갈수록 좀 더 평범하고 일반적인 삶을 모습입니다. 하지만 각 인물들의 삶과 고양이의 삶은 다소 무관합니다. 왕이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고양이가 권력을 지닌 것은 아녔으며, 마술사에게는 들러리 역할, 도둑에게는 미끼 역할일 뿐입니다. 각 주인의 역할은 1970년대에 작품을 지은 사노 요코가 생각해 낼 수 있는 다양한 여성과 남성의 삶의 군상을 표현한 것이고, 현대인에게도 그 의미가 통하는 것은 그 군상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100만 번을 누군가의 고양이로 태어났다면 아마도 모든 직업과 지위와 성별의 인물 밑에서 살아보았을 터입니다. 이 부분에서 주요한 포인트는 주인의 직업이나 지위와 성별과 무관하게 타의적인 삶을 산 고양이의 죽음 또한 타의적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이번엔 얼룩 고양이의 마지막 삶과 고양이 캐릭터로 읽어보겠습니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동물 캐릭터는 인종과 성별, 외형적 표현을 최소화하기 위한 장치로 사용됩니다. 더 많은 독자들을 위해 쓰이면서도 편견을 심어주지 않기 위한 작가의 노력인 것이지요. 하지만 사노 요코가 글을 쓴 시점은 현대적 잣대를 들이대기에는 오래된 작품입니다. 그리고 작가가 고양이로 주인공을 표현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여기에 외형적은 물론 성고정 관념을 포함한 성별적 요소가 여과 없이 글과 그림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얼룩 고양이의 외형은 모든 생에 동일했기에 이전 생에서는 성별에 대한 언급이 없어 암컷인지 수컷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생에서는 수컷 고양이입니다. 멋진 얼룩 고양이에게 신붓감이 되고 싶어 하는 고양이들이 많았다는 것과 흰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흰 고양이는 얼룩 고양이의 자랑거리인 100만 번의 삶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지만 얼룩 고양이와 생을 함께합니다. 말을 안 해도 흰 고양이가 얼룩 고양이를 좋아했다고 말하기 앞서, 특별한 의사 표현을 하지 않고 얼룩 고양이와 눈을 마주치지도 않으며 얌전하게만 그려진 새하얀 고양이는 수동적인 여성성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보입니다. 얼룩 고양이는 그런 흰 고양이를 사랑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다음에는 살아나지 않았지요.



얼룩 고양이는 흰 고양이를 사랑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았고 그것을 독자들에게 메시지로 전달합니다. 하지만 사노 요코의 <100만 번 산 고양이>의 세계관에서 수동적인 삶 타의적인 삶이 새로운 삶을 다시 살게 되는 윤회의 연결고리라면 흰 고양이의 삶 또한 재 조명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평온하고 안정적인 할머니와 함께 천수를 산 이후에도 되살아난 얼룩 고양이처럼, 얼룩 고양이와 함께 살며 자신의 의사표현을 최소화한 수동적인 흰 고양이도 그 죽음 이후 다시 살아나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찾아 살아갈 때까지 살 수 있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타인의 들러리로서의 삶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우리는 이번 생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정해진 답 이외에도 생각할 거리를 남겨보며 <100만 번 산 고양이>를 읽어보았습니다. 다음 주에도 새로운 여행지에서 여러분을 뵙겠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그림책 여행지 18] 눈사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