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내가 사랑한 모든 남자들에게>
탈덕 부정기라는 말이 있다. 마음은 다 떠나버렸으나 의리와 정으로 남아 좋아하는 척 하는 시기.
나에게는 사랑이 습관이 되어버리는 시기가 있다. 이것은 탈덕부정기와 닮았지만 다르다. 이것이 사랑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고 설렘은 줄어든 시기인데, 어딜 가나 붙어다니는 노부부 같은 느낌이다.
설렘은 사랑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오늘의 부제인 '내가 사랑한 남자들에게'는 연애가 아니라, 케이팝과 영화를 좋아하며 내가 거쳐온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케이팝의 고질병인 좋았던 추억을 끌어안기에는 오빠가 똑바로 살지 않은 순간들이 내게는 꽤 많았다. 오빠들은 데뷔 초처럼 우리가 간절할 수 없고 무대에 서는 것이 변함없이 긴장되고 설레지 않는지, 우리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지, 말할 때 숨 한번 들이쉬고 이걸 말해도 되나 생각할 만한 센스는 없는지, 이제는 옛날 케이팝 아티스트들보다 더 밀접하고 활동성 좋게 이어진 소통 창구에 한달간 얼굴 한 번 비추지 않을 정도인지.
이해한다. 회사원도 사회초년생 시절을 지나 3년차가 되고 10년차가 되면 .....제가 해요? 를 하니까. 우리는 모두 권태기를 맞아 연인과의 관계가 끝장나기도 하니까. 심지어 오빠에 대한 마음도 설렘은 줄어들기도 하니까. 그렇지만 적어도 오빠는 아이돌인 이상 똑바로는 살아주어야 하는 것 아닐까? 내가 너무 많은 것을 바란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보증 서라는 연락 한 것도 아니고 예쁘고 고운 말에 사랑 담아 버블 보낸 것이 읽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준법 시민으로 사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가? 적어도 오래 사고 안 치고 활동하다가 알아서 잘 만나 사고쳐서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정중하게 팬들에게 편지글 남기고 축하 받는 게 그렇게 어려운가?
이 글은 특정 타 팬덤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내 케이팝 덕질 질곡의 역사에 대한 나열이다. 혹시라도 묻지 말라. 그냥 울고 싶다.
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이제 구오빠가 난데없이 우주로 떠나게 생겼고 나는 구오빠가 사형부터 화학적 거세까지 운운하는 신세가 되었다. 기가 막힌 일이다. 우리는 양대산맥이 되었다. 아니다. 그러기에는 여기 각 분야 사건들의 봉우리들이 너무 많다. 정정한다. 우리는 빌어먹을 첩첩산중이 되었다.
(2023-02-10)
추가한다. 이제 내 본진의 계보였던 에스엠이 하이브에 팔린다, 합병한다, 아직 그 정도까진 아니다 하고 뒤숭숭한 상황이다. 오늘도 내 구오빠는 술에 취해 팬들을 기만했다는 것을 자랑스레 떠벌거리고 생각없이 무례한 말을 던진다. 그것이 하루이틀 일이던가 한다면 이미 구오빠라는,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끝내주게 새다가 에스엠이라는 거대한 바가지도 같이 새는 바람에 내 속만 불난 집이 되었다. 어른들의 사정이랄 것이 복잡하게 얽힌 상황이지만 그와 별개로 십년쯤 에스엠을 사랑하고 비난하고 다시 사랑하고 비난하기를 반복하니 이 상황이 얼떨떨하다.
아직 그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인간을 사랑할 수는 없다. 사랑할 만한 짓을 해야지. 그러나 내가 있다. 내가 사랑한 점은 남았다. 내 사랑은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고 좋아하던 부분은 여전히 남았다. 위에서 말한 생각없이 떠들기로는 안 빠지는 구오빠들이나 화학적 거세를 당하게 생긴 구오빠를 말하는 게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나의 일상을 특별하게 장식한다는 뜻이다. 나는 이제 누군가의 팬으로 살지 않는다. 그렇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던 시절을 기억하기 때문에,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슬퍼지지 않는다. 구오빠들이 아이돌 역사에 다른 의미로 한 획을 그을 줄이야 나도 몰랐지만 그때의 나는 즐거웠고 기뻤으니까 됐다.
그래서 이제는 케이팝을 사랑하지 않지만 케이팝 팬들을 보면 가끔 무례한 사람들처럼 너도 두고 봐라, 그 오빠 여전할지. 하고 혀를 끌끌 차고 싶은 마음보다는 좋아하는 것을 계속 좋아하라고 말하고 싶다. 아니, 사실 그렇게 말을 얹기보다는 그냥 저 멀리서 에구, 오늘도 즐거워 보이네. 그때 좋았지. 좋아보인다. 하고 의자에 앉아 웃는 느낌이다. 누굴 좋아하는 감정을 잘 아니까.
가끔 좋아하는 작품이 생긴다. 지금은 영화를 좋아하는데, 아이돌을 좋아할 때처럼 콘서트며 팬 사인회에 따라다니는 것은 아니고 (팬 문화도 많이 다르니) 어떤 작품을 좋아하면 사랑이 습관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모든 순간 열광하고 일상의 모든 순간을 채우지는 않지만, 가끔 살면서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영화의 메시지를 떠올린다. 내게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현재 그런 영화인데, 매일 말하지는 않고 처음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았을 때 가슴 벅차게 설렜던 감정은 사그라들었으나 좋아하는 부분은 바로 거기에 변하지 않고 존재하니까 여전히 사랑한다. 인생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사랑이 습관이 되어버리는 시기가 있다. 누군가에게는 그게 무서운 일로, 단물 다 빠진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원래 사랑이란 건 그런 법이다. 그러다가도 사진 한 장에 심장이 심하게 뛰고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고 잠도 안 올 정도로 떨리고 그러는 것이다. 어떤 마음이건 무슨 상관인가? 사랑이 있다면 삶은 지루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