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찬 Oct 25. 2023

피의 유전, <플라워 킬링 문>

여전히 피가 석유처럼 흐르는 땅에 대하여

마틴 스콜세지는 자비와 양보라곤 조금도 없다. <플라워 킬링 문>의 총 러닝타임은 3시간 26분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우리를 꾸짖었는데, tv 앞에 앉아 5시간이고 6시간이고 드라마며 방송을 보는데 3시간짜리가 어떻냐는 호통이었다. 하지만 요즘 현대인들을 보세요, 드라마 한 시즌을 몰아보기 힘들고 귀찮아 유투브 요약 영상을 찾고 있어요, 할아버지. 그만 뭐라고 해요.


<플라워 킬링 문>과 박스오피스 1, 2위를 다투는 작품은 이 글을 써둔 현재 시점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다. 그러니까 두 노장이, 각각 애니메이션과 영화에서 거목이자 상징인 두 사람이 관객들을 향해 호통을 치는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우리더러 똑바로 살아야 한다고 호통을 치고, 마틴 스콜세지는 <아이리쉬 맨>에서 마피아 영화의 탈을 쓴 이민자들의 삶에 대한 고해와 고발을 했듯 이번에도 오일 머니를 둘러싼 백인들의 추악함을 단 한 순간의 자비도 드러내지 않고 낱낱이 드러내 호통을 친다. 봐. 우리가 한 짓거리들을 보라고.


영화는 장례로 시작한다. 영화 후기에서 영화 분량이 너무 길며, 초반부는 잘라냈어도 좋을 것이라는 후기를 종종 보았다. 그러나 영화의 초반부가 이 영화의 전체를, 심지어는 결말마저 은유하는 부분이기에 차라리 다른 것을 잘라냈으면 잘라냈지 초반부는 잘라내서는 안 된다. 영화는 장례와 애도로 시작된다. 그것은 죽은 인간을 위한 파반느가 아니며, 전통과 문명의 죽음이다. 그리고 동시에 시작이다.


영화에서 인디언들, 원래 아메리칸 대륙의 주인이었던 이들은 구시대와 작별한다. 좋았던 시대, 신과 함께 공존하며 그들의 대지를 자부심 있게 응시하던 시대, 자연과 어울리며 그들만의 언어가 있었던 시대를 말 그대로 하나의 물건을 상징하여 땅에 파묻는다.


이것은 이후로 이어질 장례들에 대한 메타포이며, 백인들에 의해 사냥당하고 은폐당한 죽음에 대한 메타포이다. 진혼곡은 아주 처음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전통과 함께 이제까지의 생활 방식을 땅에 묻으며 통곡한다. 그리고 말한다. 우리 아이들을 백인이 가르칠 것이라고.


곧, 화면은 빠르게 변한다. 삶의 방식을 바꾸게 된 그들의 땅에서는 유전이 터지고, 인디언들은 자본을 가지게 된다. 몸에 보석을 두르고 오일 머니로 일자리를 찾아 몰려든 백인들을 하인으로 부린다. 모두 그들이 철저히, 그리고 신중히 그들 땅에 대한 소유권을 확보한 덕분이다. 재즈와 풍요가 흥겹지만 어딘가 보는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우리가 인디언들에 대해 아는 것중 그들이 사냥당했다는 것이 명백하게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백인들을 향한 인디언 족장의 연설이 한국의 국어 교과서에 실리지 않았는가.


우리에게도 ‘인디언 보호구역’은 낯설지 않다. 원래 그 땅의 주인공이었던 인디언들은 백인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살해당했다. 그들 문명이 궤멸당하고, 그들이 더는 항쟁할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야 백인들은 그들에게 선심 쓰는 척 인디언 보호구역을 지정했다. 이것에 대해 말하려면, 우리는 먼저 키트 카슨을 알아두어야 한다.


미국 하면 떠오르는 ‘카우보이’ 이미지와 서부극의 시초는 키트 카슨이다. 그러니까 지금의 ‘다소 미화된’ 서부극, 은행 털이나 강도를 권총으로 빵빵 쏘고 올가미를 크게 휘두르는 <토이스토리> 속 우디 이미지와 다르게 ‘키트 카슨’은 서부영화의 원조다. 가련한 여자를 구하며 인디언들을 쏴 죽이는 그런 영화.

키트 카슨은 뉴멕시코의 나바호족을 보호구역으로 몰아넣었다. 백인들의 생각으로서는, ‘멸종’이 아니라 일정 구역에 가둬 생활하게 하는 것이 그들로서는 자비였다. 그리고 동시에 인디언들을 한 곳에 몰아넣은 후 기독교 정신을 가르쳤다.


<플라워 킬링 문>에서 그런 대사가 나온다. 인디언들이 총에 맞아 살해당하고, 익사하고, 유모차를 끌고 나온 인디언 여자를 뒤에서 쏴죽인 후 아기는 납치하고 손에는 권총을 두어 자살했다고 수사를 종결하는 것으로 모자라 30명 이상의 인디언이 죽어나간 후에도 살인죄가 적용되는 것은 어려우리라는 대사였다. 그들은 ‘개만도 못하’다는 대사였다. 정확히는, ‘개를 발로 찬 사람이 벌 받는 게 더 쉽다’는 것이다.


키트 카슨은 나바호족을 몰아낸 후 그 땅에 있는 황금따위의 자원을 차지하려고 했다. 그리고 군대를 끌고 가 나바호족이 살던 아름다운 벌판을 피로 물들였다. 저항하는 나바호족 성인 남성들을 총으로 쏘았다. 가축을 죽이고, 그들의 밭을 불태웠다. 여자와 아이를 포획했고, 그렇게 포획한 자들은 수백 킬로미터를 걸어 이주당했다. 그리고 이 문단에서 떠오른 것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에 그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나바호족 외에도 인디언들은 죽음의 행군을 해야 했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에는 죽은 여동생을 안고 걷는 오빠의 모습, 죽은 아내를 안고 걷는 남편의 모습, 죽은 부모를 업고 걷는 아들의 모습이 묘사되었다. 인디언들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인들이 발이 부르트고 얼어죽으며 만주에서 러시아 땅을 떠돌며 강제 이주당했던 것처럼 그렇게 하염없이 걷고 또 걸으며 죽어야 했다.


현재의 인디언 보호구역은 관광과 카지노를 운영한 돈으로 생활하고 있다. 보호구역 안에서는 합법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인디언 보호 구역 내는 갱단과 알코올 중독, 살인과 성폭력 범죄로 슬럼가처럼 범죄가 만연하다.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치안 역시 제대로 수사가 진행되지 않은 탓에 그리 좋지 않다. 마약이 청소년들 사이에서 돌고, 청소년 자살률이 유행처럼 번진다. 인디언 여성의 40%는 가정폭력을 경험하고, 드러나지 않은 피해자들은 더 많다.


백인들이 여전히 인디언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서 재산을 빼앗기 위해 ‘순혈‘ 인디언 여성과 결혼하고, 그를 살해하고,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의사는 ’살인 사건의 흉기인 총알을 찾는다‘는 명목 하에 시신을 엉망으로 훼손한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주인공 어니스트 버크하트 역시 부유한 인디언 여성인 몰리 버크하트와 결혼했다. 그는 몰리 버크하트와 결혼해, 사랑에 빠졌음을 당당히 시인하지만 도박을 위해 인디언을 강도짓하고 유산을 독차지 하기 위해 로버트 드 니로가 맡은 ‘윌리엄 헤일’, 즉 자신의 삼촌과 작당하여 아내의 자매들을 차례로 죽인다. 때로는 자신이 직접 지시를 내리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아내가 고용한 탐정을 흠씬 두들겨 패기도 하며.


그는 헌신적으로 종족 모두가 앓는 당뇨병을 앓으며 죽어가는 몰리를 돌본다. 그러나 몰리 버크하트의 자매를 죽이고 어머니를 죽어가도록 부채질한 것은 어니스트 버크하트다. 좋은 남편이었느냐고 묻는다면, 그가 부인에게 보인 헌신과 아이들을 향한 사랑을 부정하지는 않으나 나는 그것을 위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아내를 돌보지만 동시에 죽인다.


또 그가 유독 아끼는, 당구장에 데려가고 수차례 이름을 언급하는 자녀는 ‘카우보이’다. 아들과 아버지의 유대감을 제외하고 봐도, 그의 부모가 아기 시절의 카우보이를 보며 이 애는 전에 태어난 아이보다 희고 백인에 가깝다고 말하는 장면과 더불어 하필이면 ‘카우보이’인 것을 본다면, 본래 ‘카우보이’의 이미지인 키트 카슨이 저지른 죄를 떠올린다면 어니스트의 가정은 허상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몰리 버크하트는 말한다. 다음은 당신 차례라고.


영화를 보는 내내, 지루하지 않았다. 몰리 버크하트의 불행 속에서 나는 익숙한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일제강점기에 죽어가던 조선인들을 보았고, 현대에 와서도 빈곤과 실업에 절망하며 집단 자살하는 인디언 보호구역의 청소년들과 그 땅에 세워진 카지노를 보았다.


이 영화에서 로버트 드 니로, 마틴 스콜세지의 페르소나와도 같은 그가 이번에 맡은 것은 마피아가 아니다. 죄 지은 백인의 전반을 담당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는 또 한 번의 ‘대부’를 연기했다. 어릴 적 인디언들의 모습을 추억하고 인디언들의 말을 하며 웃으나 자신을 교만하게도 ‘킹’이라고 부르는 남자를 연기했다. 로버트 드 니로는 마틴 스콜세지의 페르소나로서 움직인다. 감독은 인디언들을 죽이고 땅을 빼앗은 백인들에게 조금의 면죄부도 남기지 않는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처럼 굴지만, 그리고 옳은 일을 할 것처럼 굴지만 고작 말 몇 마디에 휘둘리고 심약하고 찌질한 모습을 보이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어니스트’, 위선자에 살인자인데다가 교만한 로버트 드 니로의 ’킹‘. 마틴 스콜세지는 이 영화에서 조금도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찌르면 피가 나지 않는가? 독을 먹이면 죽지 않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