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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찬 Sep 18. 2024

단 한 명의 팬을 위한 영원한 앙코르

영화 <룩 백> 해석과 감상

어떤 영화들은 시작과 함께 이 영화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을 준다.

만화 그리기에 몰두한 후지노의 구부정한 뒷모습으로 시작한 영화를 보며 분명 이 이야기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룩백>에서 방은 세계다. 많은 영화가 그렇듯 방은 인물의 내면이자 세계이고, 그 밖으로 나가야만 하는 인물은 사실 등교거부 청소년인 '쿄모토'뿐만 아니라 '후지노'까지 포함된다. 왜냐하면 후지노는 영화의 끝까지, 쿄모토의 방문이자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을 상징하는 문을 열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후지노의 방은 후지노의 내면과 의식 세계이기도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그를 완성하는 공간은 지금까지 열어볼 생각도 하지 못했던, 늘 복도에만 머물러 '나가보지 못한/들여다보지 못한' 쿄모토의 작은 방이다.



1. 콤비

사실 "만화"에 재능이 있던 것은 처음부터 후지노였다. 학보에 실린 쿄모토의 그림은 분명 천재같고 멋졌지만 스토리가 부재한 장면과 장면, 즉 배경일 뿐이다. 그는 네 컷 만화의 칸을 빌려 제목을 붙이고 그림을 빌렸지만 그곳에는 인물도 스토리도 없다.


쿄모토는 '만화를 그리는 행위'에 단 한 순간도 조바심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후지노는 다르다. 후지노의 그림 실력은 경쟁자인 쿄모토를 뛰어넘겠다는 마음을 먹은 순간부터 점차 늘었다. 사실 '만화 같은 건 그릴 때 힘들기만 하고 오래 걸리니까 볼 때만 재미있어~' 하던 후지노야말로 만화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인물이다.


쿄모토는 초등학생 때부터 내내 풍경과 정물화를 그려왔다. 자신이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를 잘 몰라, 자신이 익히 아는 '후지노'를 기준 삼아 그것이 만화라고 여긴 것이다. 왜냐하면 후지노 선생님은 멋있고 대단하니까.


사람이 무서워 방 밖으로 나가지 못하던 쿄모토는 방 안에서 바깥을 상상하고 그려왔을 것이다. 처음 후지모토에 의하여 밖을 나왔을 때, 그녀는 자신이 보지 못했으나 연습장을 몇 권이고 채우도록 그려왔던 풍경을 오랜만에 보았을 것이다. 그때부터 쿄모토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천천히 깨달았다. 이건 '만화'가 아니고, '만화의 배경'이 아니고,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위해서는 미대에 가야 한다는 것을.


둘 모두 어렸고 그 차이를 몰랐을 뿐이다. 처음 쿄모토의 그림을 본 후지노는 상식이 재정립되고 최초의 실패, 재능의 차이를 맛보는 계기가 된다. 그럼에도 후지노는 만화의 길을 걸어야만 하는 사람이다.

'용서 못해! 나보다 잘 그린다니!'하고 식식거리며 돌아온 것은 그동안 잘난 나에 대해 가진 자부심뿐만 아니라, 만화가 자신에게 너무도 특별하고 소중했기에 느낀 감정이다.


만화를 그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대단해보이고 싶었던, 자신에게 의미 있던 것은 운동이 아니라 만화였다는 것을 내심 알기에 만화를 포기하고도 쿄모토에게 '후지모토 선생님!' 하고 인정받은 순간 누군가 등을 떠밀어준 것처럼 내달렸던 후지노.

처음부터 사람이 아니라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고, 모든 컷에 사람이 등장하던 후지노와 다르게 사람이 부재한 습작들만 남기며 자신이 만화를 그린다고 생각했지만 알고보면 미대에서 미술을 전공했어야 하는 욕망을 후지노와 함께하며 찾아낸 쿄모토.


'평행 우주'에서도 쿄모토가 미대생이 된 것 역시 당연한 수순이었다. 쿄모토가 사랑한 건 만화가 아니라 '후지노의 만화'였으므로. 왜냐하면 쿄모토가 후지노가 만화를 그리게 된 '계기'였던 것처럼, 후지노는 쿄모토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으며 하고 싶은 것을 찾게 한' 계기이기 때문이다.



2. 룩 백

'룩백'은 회상, 후회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두 가지로 사용된다. 회상과 후회/그리고 늘 우리를 등지고 창문 앞에 앉아 우리는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며 만화를 그리고 또 그리는 후지노의 등을 의미한다.


영화에서 '룩백', 평행 우주에서 후지노에게 구해진 쿄모토가 그린 만화의 제목은 원래 제목이 '뒤를 돌아봐!!/어이! 뒤에 봐!!' 정도의 가벼운 느낌이다. '평행 우주'에서 방 밖을 나오지 않은 쿄모토는 살해 당하지 않지만, 쿄모토의 등을 또다시 밀어주는 계기가 되어준다.


이 '평행 우주'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시간선에서 둘은 '중학생 콤비'로 만화를 내지 않고, 후지노가 다시 만화를 그리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쿄모토는 늘 후지노의 팬이다. 문틈으로 후지노에게 답변이라도 주듯 네 컷 만화가 넘어오지만, 그것은 실제가 아니다.


후지노가 주웠던 만화는 '쿄모토'가 그린 것이 아니다. 후지노가 그리던 방식의, 후지노의 만화다. 후지노가 작업실에 붙여둔 네 컷 만화 종이는 텅 비어 있다. 자신의 모든 것이 시작한 빈 네 컷 만화 종이, 초등학생 때의 자신이 들고 다니던 빈 종이 위로 자신의 희망을 덧그린 것이다.


'쿄모토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만화를 그리지 않고 도장을 다녀서 쿄모토를 구해주고 싶어!' 하는 욕망이지, '평행우주'나 '룩백'이라는 네 컷 만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후지노를 실제로 움직인 것은 자신의 만화를 자신만큼 사랑해온 쿄모토의 모든 순간들이 고스란히 남은 방이다. '다음 편을 그려야만 하는' 이유와 사명감, 그리고 만화를 사랑해온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그것을 되찾은 공간이다.

후지노는 쿄모토의 죽음 이후 처음으로 그의 방문을 연다. 등교거부 학생인 쿄모토가 '평행우주' 세계관에서 만들던 작품은 닫힌 방문이다. 이것은 <인터스텔라> 식의 평행우주가 아니다. 쿄모토가 끝내 방문을 열고 나와 세상을 만났듯, 후지노는 자신의 영원한 팬인 쿄모토를 불합리하게 잃고서야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그것은 바로 '룩백'이다. 내가 만화를 왜 그리고 싶었고, 내게 무엇이 소중했던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했던가, 하는 것을 자신의 내면을 '회상하고 되돌아보며' 어둠 속에 주저앉아 있다가 마침내 밝은 바깥, 즉 '쿄모토의 방'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그 공간은 후지노가 영원히 간직할 자신의 세계다. 창작자의 원동력이다. 그 공간, 망자의 흔적보다 '후지노 선생님'에 대한 물건들이 잔뜩 남아 있는 것으로 연출된 공간은 실제 쿄모토의 방이기도 하지만 '후지노 선생님'이 영원히 간직하게 될 창작자로서의 마음가짐 그 자체다.


쿄모토가 마지막으로 읽었을 '샤크맨'은 마지막장에서 '샤크맨이 간다!'하고 끝난다. 마치 평행세계 후지노가 발차기로 괴한을 제압한 것과 같은 구도다. 평행우주에서의 구원은 그렇기에 후지노의 바람일 뿐이다. 후지노가 초창기에 그리던 만화처럼 논리 없는 세계. 친분이 있던 것도 아닌 후지노가 '이얍!'하고 나타나 범인을 제압하고, 범인을 왜, 어떻게 제압했는지 구급대원에게 여봐란듯이-하지만 우리에게 납득시켜주기 위해-설명을 미주알고주알 늘어놓는 것은 '네 컷 만화' 그 자체다.

실제의 현실은 비어 있는 네 칸 만화와, 자신과 틀어진 뒤에도 자신을 응원하고 있던 쿄모토의 방이다. 가장 최신화까지 따라오며 만화를 읽던 쿄모토의 마지막 모습이다. 후지노가 만화를 그리지 않게 되면, 쿄모토는 다음을 알지 못한다.


후지노는 그래서 연재를 중단했던 '샤크맨'을 다시 그리러 떠난다. 두 사람이 걸었던 눈길을 홀로 걸어서, 쿄모토에게 다음편을 보여주기 위하여 샤크맨을 그리러 간다. 그리고 우리에게 처음 영화가 시작했을 때처럼 등을 보여준다.


창작은 구부정한 등과, 타인의 재능에 대한 질투와, 사계절이 그토록 아름다움에도 자기 앞의 화면이나 종이에 몰두하여 흘려보낸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창작의 과정은 멋있지 않다. 잉크를 쏟기도 하고, 어시스트를 갈아치우기도 하고, 동업자에게 심한 말을 늘어놓으며 구질구질하게 붙잡기도 하고, 전전긍긍하며 다리를 떨어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만화를 그린다면 그건 너와 나를 위해서라고, 후지노는 구부정한 뒷모습으로 말한다. 아무것도 아닌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던 너와, 누군가 나를 알아봐주고 내가 사랑하는 나의 만화를 읽어주기를 기다리던 나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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