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넘어 산, 그 뒤의 한 줄기 빛
월세가 비싸기로 유명한 런던에서 백수로 지내다 보니 내 통장은 하루하루 마이너스를 향해 가고 있었다. 영국에서 구직을 시작한 지 두 달이 넘어가면서 초기 정착 자금으로 가져온 돈은 점점 바닥나고 있었고, 대충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한 달 안에는 취업이 되어야 자금을 메울 수 있었다. 취업이 안 돼서 돈이 다 떨어지면 이대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한국에 돌아가거나, 돈을 빌려서 진정 마이너스의 삶을 살아야 했다. 두 상황 모두 상상조차 하기 싫은 시나리오였기에 어떻게든 빨리 취업을 하고 돈을 벌어야 했다.
점점 초라해지는 통장 잔액을 보고 나면 좀처럼 면접 공부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물론 준비를 더 철저히 할수록 면접 합격률이 높아진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계속 공부만 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결국 2주간의 짧은 준비 후 다시 면접 시장에 뛰어들었다.
짧은 기간이나마 공부를 하고 면접을 보니 처음보다는 눈에 띄게 성과가 나아졌다. 전에는 감도 못 잡고 2차 기술 면접부터 우르르 탈락했었는데, 이번에는 이 단계까지 통과한 회사가 꽤 있었다. 그렇게 2차 면접을 통과해서 최종 면접까지 가게 된 회사는 총 네 군데였다. 다시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번 기회에 최종 면접에 합격해서 취업에 성공하면, 돈이 다 떨어져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최종 면접은 만만치 않았다. 한 시간 남짓 소요되는 2차 면접과 다르게 4~5시간씩 진행되는 최종 면접에서는 부족한 실력을 숨기려 해도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2주간의 공부로 이런 장시간 면접에 100% 대비하긴 무리였다. 사실 70%도 대비가 안 된 것 같았다. 결국 네 개의 회사 중 처음 연락 온 두 군데에서 최종 면접 단계를 넘지 못하고 탈락하고 말았다. 이번엔 공부를 좀 하고 봤으니 잘하면 붙을 수도 있겠다는 기대가 있었는데, 이 정도 준비로는 어림도 없다며 제대로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그럼 얼마나 더 공부해야 합격할 수 있는 거지? 돈이 다 떨어지기 전에 취업이 되기는 할까?’
머릿속에 스스로를 향한 의심이 몰려왔다. 연이은 실패를 겪은 뒤 자신감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이놈의 실패는 언제쯤 성공의 어머니로 탈바꿈해 주는 건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자초해서 이 상황까지 온 것이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원망할 사람은 오로지 나 자신뿐이었다. 이 모든 걸 쉽게 생각하고 철저히 대비하지 않았던 과거의 나를 원망했다. 영국에서 개발자로 살겠다며 당당하게 퇴사하고 왔는데, 안부를 묻는 지인들에게 몇 달째 구직 준비만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는 게 창피했다. 차라리 한동안 나의 안부를 묻지 않아줬으면 했다.
공부고 뭐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면접 공부를 하려고 노트북 앞에 앉아도 도무지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단 이 무기력한 감정에서 벗어나야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분 전환을 위해 누군가에게 내 감정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누구에게도 이런 바보 같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가끔 적는 일기장을 펼쳤다. 일기장은 무엇을 적든 나를 평가하지 않고 묵묵히 들어주는 존재였기에 일기를 쓰면 기분이 나아지는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우울감이 자주 찾아오는 요즘은 전보다 일기를 부쩍 자주 썼다.
영국에 오기 전 적은 일기를 읽어 보았다. 지금과 달리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며 부족하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지만, 하나도 행복하지 않았다. 별다른 목표 없이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적인 일상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국에 가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날들이었다. 그 일기를 읽는 나는 당시 그렇게 가고 싶었던 영국에 와 있었고, 그때와 달리 해외 취업이라는 뚜렷한 목표가 생겼다. 그 목표를 향해 불안하고 초조한 날들을 견뎌내고 있는 나 자신이 새삼 기특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우연히 펼쳐 본 예전 일기에서 다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었다.
일기장에서 마주한 과거의 나에게 당당해지고 싶었다. 그때의 내가 그렇게 바라던 런던에 와 있는데, 여기까지 와서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남아 있는 두 개의 최종 면접에서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고 오리라 다짐했다. 다시 힘을 내서 노트북을 열고 다음 면접을 위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결과가 어떻든 후회 없이 모든 걸 쏟고 오겠다는 생각으로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준비했다.
남아있는 모든 힘을 짜내서 마지막 두 개의 면접을 마쳤다. 두 면접이 일주일 간격으로 잡혀 있었는데, 마지막 면접을 보기 전날까지 그전 회사에서 별다른 연락이 없었다. 그동안 기대하고 실망하는 걸 여러 번 반복하면서 깨달은 건 기대치를 줄여야 실망도 덜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냥 ‘여기도 떨어졌구나’ 하고 체념한 상태로 마지막 면접을 준비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런데 마지막 면접을 마치고 집에 가던 길에 내 기분을 180도 바꿔줄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일주일 전에 본 면접 결과를 알리는 메일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메일을 열어본 순간, 지금까지 받았던 메일과 다르게 “Good news”라고 시작하는 첫 문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한 문장에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처음으로 탈락이 아닌 합격 메일을 받은 것이다.
내가 정말 붙었다고? 떨어진 줄 알았던 면접에서 합격 메일을 받은 게 믿기지 않아 같은 내용을 여러 번 읽어봤다. 다시 봐도 정말 합격이 맞았다. 긴 구직 준비의 끝에 취업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은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벅찼다. 반복되는 탈락 소식에 좌절했던 지난날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이 순간이 몇 배는 더 기쁘게 느껴졌다. ‘Good news’가 아니라 ‘Amazing news’라고 해도 모자랄 정도로 너무나도 간절히 기다리던 첫 합격이었다.
“나 합격했대!”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가장 먼저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 달 만에 가족들에게 탈락이 아닌 합격 소식을 전할 수 있다니, 이보다 뿌듯할 수 없었다. 친한 지인들에게도 부리나케 이 기쁜 소식을 전했다. 다들 나의 합격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고, 다시 지인들과의 연락이 즐거워졌다. 그날 하루는 그렇게 합격 소식을 알리느라 몇 시간 동안 휴대폰을 붙들고 있었다. 오랜만에 아무것도 안 하고 휴대폰만 보고 있어도 죄책감이 들지 않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