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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지현 Mar 04. 2022

오늘부터 나도 영국 직장인

영국 회사로의 첫 출근날

드디어 기다리던 첫 출근날 아침이 밝았다. 세 달간의 백수 생활이 끝나고 다시 출근할 회사가 생겼다는 게 아직도 실감 나지 않았다. 영국 취업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돈이 다 떨어져서 한국으로 돌아가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새 면접에 합격해 이렇게 영국 회사로 출근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감개무량했다. 지난밤에는 설레는 마음에 잠도 설쳤다.




오늘부터 나도 영국 직장인

오늘부터 나도 영국 직장인이 되었다. 런던에 온 뒤로 여태껏 집에서 구직 준비만 하느라 러시아워에 집 밖에 나갈 일이 없었는데, 출근길에 지하철을 타니 전에 보지 못했던 런던의 지옥철을 경험할 수 있었다. 충분히 눈살을 찌푸릴 만한 인파였지만, 오늘만큼은 붐비는 런던 지하철을 타는 것조차 새롭고 즐겁게 느껴졌다. 출근길에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런던 직장인들 사이에서 신나게 걸으며 나도 그들 중 한 명이 되었다는 기쁨을 온몸으로 만끽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사무실에 도착했다. 불과 일주일 전에 최종 면접을 보러 왔던 사무실에 직원 신분으로 발을 들이니 감회가 새로웠다. 사무실은 스타트업답게 오픈된 공간에 아기자기한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었고, 벽 곳곳에는 각종 미팅의 결과물로 보이는 포스트잇 노트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인지 아직 출근한 직원이 별로 없었는데, 어리바리하게 주위를 둘러보고 있으니 누군가 다가와서 인사를 하며 내 자리를 알려 주었다. 앞으로 나와 같은 팀에서 일하게 될 동료 D였다.


세 달 만에 생긴 사무실 내 자리


몇 달 전에 팀에 합류했다는 D는 폴란드에서 온 개발자였다. 그도 나와 비슷하게 계속 폴란드에서만 일하다가 런던에 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D와 나는 생긴 것도 다르고 살아온 배경도 다르지만, 같은 외국인 노동자라는 동지애 하나로 금방 공감대를 형성했다. 그는 내 자리 세팅을 도와주고, 본인의 마우스를 써보라며 빌려주는 등 사소한 것까지 세세하게 챙겨주었다. 그 덕분에 어색하고 낯설었던 사무실이 조금은 따뜻하게 느껴졌다.



팀원들의 따뜻한 환영

조금 있으니 나의 상사인 S가 도착했다. 그는 나의 상사이자 우리 팀의 리더, 그리고 이 회사의 CTO이기도 했다. 대기업에 다닐 때는 직급에 ‘C’ 자가 들어가는 임원들은 얼굴을 보기도 어려웠는데, 작은 스타트업에 오니 CTO가 바로 위 상사라니 정말 생소한 직급 체계였다. 이런 직급 체계보다 더 신선한 건 직급에 상관없이 서로를 이름으로만 부른다는 사실이었다. 사장부터 인턴까지 모두 서로를 존대 없이 이름으로 부르는 광경은 미드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이 신기했다. 아직은 이런 문화가 조금 어색했지만, CTO가 나를 지현이라고 부르듯 나도 그를 S라고 불렀다.


“오늘 우리 팀에 합류한 개발자 지현에게 인사를 하러 오시면 자리에 있는 도넛을 드립니다!”


S가 출근길에 도넛을 한 박스 사 왔길래 이게 뭔가 싶었는데, 나의 첫 출근날을 위한 준비물이었다. 그는 내 책상 위에 도넛을 올려두고는 직원 단체 채팅방에 ‘도넛 프로모션’ 공지를 올렸다. 재치 있게 도넛으로 홍보를 해준 덕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내 자리에 인사를 하러 왔고, 자연스럽게 도넛을 집어 먹으며 그들과 서로 얼굴을 트고 얘기를 나눴다. 낯선 환경에서 내가 먼저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기에는 조금 어색했는데, S의 배려심 덕분에 수월하게 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나도 나중에 누군가의 상사가 된다면 그의 첫 출근날에 도넛을 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사람들과 도넛 토크를 나누다 보니 업무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마지막 일정은 회사 전체 미팅이었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60명가량 되는 직원 중 동양인은 나 혼자뿐이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정말 동양인이 나 빼고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내가 이방인이라는 게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혼자가 아니라고 느꼈던 건, 첫날부터 이곳의 사람들이 보여준 따뜻한 친절과 배려심 덕분이었다. 유럽 사람들은 시크하고 정 없을 것 같다는 편견이 있었는데 영국에서 이런 다정함을 보게 될 줄이야.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팀에 합류한 만큼 열심히 일해서 좋은 팀원이 되겠노라 다짐했다.




오랜만에 기분 좋게 바쁜 날이었다. 회사의 첫인상이 너무 좋아서 앞으로의 회사 생활이 무척이나 기대됐다. 이곳에는 대기업처럼 체계적인 교육 과정이나 조직적인 입사 프로세스는 없었지만, 나를 따뜻하게 맞아준 팀원들이 있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구직하는 동안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낙동강 오리알 신세였는데, 이제 드디어 나의 팀에 생겼다는 게 든든했다. 앞으로 이 회사에서 어떤 일이 펼쳐질지는 모르지만 이런 좋은 팀과 함께라면 어떤 일도 잘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런던에 온 지 세 달 만에 링크드인에 회사 정보를 업데이트하고 기쁜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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