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진심인 영국인들
영국인들은 한국인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술을 좋아하는 것 같다. 영국에는 카페 하나 찾기 어려운 한적한 동네라도 펍은 곳곳에 널려 있는 풍경이 흔한데, 호기심에 찾아보니 영국에는 펍이 카페의 두 배 정도로 많다고 한다. 그만큼 커피보다는 술 한 잔 하며 사람들과 대화하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평소에는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 무뚝뚝한 영국인들도 술에 취하면 왁자지껄 떠들고 크게 웃곤 하는데, 아마도 그 해방감 때문에 술을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다.
영국에서 처음 다닌 회사는 작은 스타트업이었고, 동료들은 대부분 내 또래의 젊은 친구들이었다. 비슷한 나이 또래의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그런지 일 외적으로도 친구처럼 편하게 지내는 동료들이 많았다. 나도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영국에 온 터라 동료들과 친해지고 싶었는데, 한국과 마찬가지로 영국에서도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함께 술을 마시는 것이다. 술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입사 초반에는 동료들과 어울리고자 술자리에 종종 따라가곤 했다. 영국 동료들과 술을 마시며 이들을 관찰해보니 영국 회식 문화에 관한 의문점이 세 가지 생겼다.
입사 첫 주에 꽤나 놀랐던 광경이 떠오른다. 금요일 4시가 되자 한 동료가 맥주를 권하는 것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동료들은 이미 맥주를 한 캔씩 들고 있었다. 스타트업 분위기가 자유롭다고는 들었지만 회사 사무실에서 술판을 벌일 정도로 자유분방할 줄이야. 심지어 근무시간도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사무실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다니. 나도 쿨한 척 맥주를 받아 마셨지만 코리안 유교걸로서 이들의 사무실 음주 문화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알고 보니 매주 금요일은 술이 무료로 제공되는 날이었는데, 이를 나름의 회사 복지로 생각하는 듯했다. 물론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복지로 생각할 만하다. 보통 4시부터 각자 자리에서 맥주 한 잔씩 마시다가 6시가 되면 퇴근할 사람은 가고, 더 마실 사람은 사무실 카페테리아에 모여서 원하는 만큼 마신다. 그냥 자연스럽게 매주 금요일에는 자발적 회식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누구도 술자리를 강요하거나 눈치를 주진 않기 때문에 전혀 부담 가질 필요는 없다.
회식에 강제성이 없다 보니 한국과 달리 회식을 기피하는 분위기는 보기 어렵다. 한국에서는 아무리 ‘자발적’ 회식이라고 해도 참석에 대한 부담을 주는 경향이 있는데, 영국에서는 정말 말 그대로 남고 싶은 사람들만 남는 회식이기 때문에 이를 동료들과 공짜 술을 마실 수 있는 기회로 본다. 술을 마시고 싶지 않은 사람은 그냥 집에 가면 그만이고, 술자리에 가서도 마시고 싶은 만큼만 마시면 된다. 술자리에서만 하는 중요한 일 얘기 같은 건 들어본 적 없고, 오히려 술자리에서 일 얘기를 하면 좋은 시간을 망친다고 욕먹는 분위기다.
금요일에 몇 번 남아서 동료들과 함께 술을 마셔봤는데, 늦게까지 마실 때는 11시가 넘어 귀가한 적도 있다. 장점이라면 그때까지 술을 마셔도 모두 공짜라는 점이나, 의아하게도 술과 함께 음식이 제공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이에 개의치 않고 밥 없이도 술을 잘만 마셨다.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공복에 술을 마시는 동료들을 보며 다음 의문점이 생겼다. 왜 밥을 먹기 전에 술부터 마실까? 공복 음주가 몸에 안 좋다는 사실을 모르는 걸까?
물론 모이는 장소가 식당이나 펍이라면 자연스럽게 술과 함께 음식을 주문하기는 한다. 하지만 사무실에서 술을 마시는 경우에는 밥이 필수는 아닌 듯하다. 짐작컨대 맥주 한두 잔은 그냥 가벼운 음료로 생각하지만 저녁까지 먹으면 조금 더 오래 남아야 하니 부담을 느껴서 그런 것 같다. 보통 가볍게 한두 잔 마시고 가는 사람들은 그냥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늦게까지 남는 사람들은 한참 술을 마시다가 배고파지면 음식을 찾기 시작한다. 동료들과 함께 한참 술을 마시다가 밤 10시에 다 같이 카레를 먹으러 간 적도 있다. 한국인 같으면 저녁부터 먹고 시작할 텐데 10시까지 용케 밥 없이도 술을 마신 게 신기할 따름이다.
친한 동료들과는 따로 사무실이 아닌 펍에서 술을 마시기도 했는데, 영국의 펍은 내부 공간이 좁고 자리가 별로 없는 곳이 많다. 한국인이라면 자리가 있는 다른 펍을 찾아 나서겠지만, 영국인에게 앉을자리가 없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앉을 데가 없으면 서서 마시면 되지 뭐?’ 하는 마인드로 몇 시간이고 밖에 서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의자가 없는 스탠딩 테이블이 배치되어 있는 곳도 있고, 그런 것조차 없더라도 그냥 손에 맥주잔을 들고 마시기도 한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밖에서 서서 마시는 게 안에 앉아서 마시는 것보다 훨씬 좋잖아.”
왜 밖에서 서서 술을 마시는지 동료에게 물어봤더니 맑은 날씨를 즐기기 위해서란다. 흐리고 비 오는 날이 흔한 영국에서 화창한 날씨는 아주 반가운 손님인데, 따뜻하고 해가 쨍쨍한 여름날이면 잔디밭에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고 펍 주변도 유난히 북적인다. 이런 날에는 오랜만에 찾아온 맑은 날씨를 마음껏 즐기기 위해 다리가 조금 아프더라도 밖에 서서 마시는 게 훨씬 즐겁다고 한다. 영국에 어느 정도 살다 보니 이 마음도 이해가 간다.
이렇게 자유롭게 서서 마시는 분위기 때문에 술값은 주문과 동시에 계산하는 펍이 많다.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후불 계산을 받기는 어려우니 선불로 술값을 받는 것이다. 보통 각자 계산한 술을 가지고 나와서 서서 마시다가 본인의 술이 떨어지면 다시 바텐더에게 가서 주문을 하는데, 이렇게 마시다 보면 자연스러운 더치페이가 가능하다. 각자 마신 술은 각자 계산하면 되기 때문에 술값을 계산할 때 어색한 눈치 싸움을 할 일은 없다.
문화는 조금씩 다르지만 한국이나 영국이나 술은 친목의 수단으로 유용하게 쓰인다. 어디서 어떻게 마시는지보다는 좋은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는 자체가 더 중요한 것 같다. 동료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가장 좋았던 건 그들과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하지 않았을 질문을 하고, 일 외의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별 것 아닌 일에도 함께 웃으며 그렇게 우리는 동료에서 친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