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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글나글 Aug 12. 2021

내가 바로 진또배기 집순이다!

지박령 수준의 집순이가 된 이유 몇 가지



친구가 "어디야?" 혹은 "뭐해?" 라고 묻는다면, 진짜진짜 집순이가 아니다.

"집이냐?" 라고 묻거나 이런 질문조차 건너뛰고 본론부터 말하는 친구를 뒀다면 진또배기 집순이라고   있다.

나의 친구들은 나에게 굳이 어디인지, 뭐하는지 묻지 않는다. 물어봤자 집일 거고, 딱히 뭐 하고 있지도 않을 걸 너무 잘 아는 거지.


그렇다, 나는 찐집순이다!


심지어 내가 약속이라도 있다고 하면 이젠 믿지도 않는다.

"네가?" 졸지에 업신여김 당하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참나.


나는 집에 있는 걸 좋아한다. 그것도 혼자 집에 있는 걸 즐긴다. 회사에 다닐 때에도 거의 대부분 퇴근하면 곧장 집으로 갔다. 주말에도 별 약속이 없으면 집 밖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건 다반사였다.

이런 집순이스러움은 나이가 한 살 한 살 추가되면서 더 완벽(?)해졌다.


기본적으로 집순이 기질을 타고난 것 같지만, 그래도 20대 때는 나도 밤새 신나게 놀고 이른 아침 이슬 맞으며 첫차 타고 집에 들어가기도 하고, 여름이면 워터파크로 바다로 놀러가기 바빴다. 그때 사 모은 비키니가 빨주노초파남보 각양각색이었지, 아주.

이제 막 3호선을 탔을 때까지만 해도(*요즘 인싸 어르신들의 나이 소개법, 열정 열정 열정!!!) 주말마다 약속 잡고 나가 놀고도 월요일에 쌩쌩하게 출근하고 그랬더랬다.


그때까지 나는 세미-집순이였던 것이다.

그랬던 내가 이렇게 지박령 수준의 집귀신이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첫째로, 체력이 하루하루 다르다. 이건 뭐, 동년배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일 거다.

이제는 친구들과 제대로 놀려고 작정하고 만나도 12시가 넘어가면 하나 둘 배터리가 빠르게 방전되고 만다.

"이제 스을슬 집에 가자아~"

이 말이 누군가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너 나 할 것 없이 자연스럽게 일어날 준비를 하고 또 자연스럽게 헤어진다. 나도 한때는 밤새 놀고도 풀메이크업까지 하고 1교시 수업 나가던 젊은이였는데...


그랬던 내가 하루가 다르게 쇄약해져갔다. 정말 하루하루 다르다. 과장 아니다.

월화수목금 흐물흐물 껍데기만 남은 육신을 끌고 어딜 가서 뭘 한단 말인가. 어느 순간부터 평일에 잡는 약속은 말도 안 되는 게 되어버렸고, 주말에는 요양하느라 꼼짝도 하지 않게 된 것이다.


둘째로, 같이 놀 친구가 없다. 와, 쓰고 보니 완전 슬프다.

내 친구들은 모두 결혼을 일찍 한 편이다. 20대에 결혼한 친구들도 많고, 이제는 결혼하지 않은 친구가 몇 안 남았다. 얘들아, 우리 결혼하지 말고 나이 들어서 한 건물에 살면서 오순도순 노후를 즐기기로 하지 않았니?

나랑 이 약속 한 친구들 한 명도 안 남고 다 갔다. 그럴 거면 나더러 약속 어기고 제일 먼저 결혼할 것 같단 소리는 하지 말지 그랬냐...? 쳇.


친구들이 결혼해서 심술난 건 당연히 아니다. 다만, 나와 생활패턴이 너무도 달라진 친구들과 점점 만나기가 힘들어진다는 게 슬플 뿐이다. 그나마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는 자주 보는 편이었지만, 이제는 대부분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더 만나기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가끔 아이를 데리고 만나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친구들과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돌아가면서 조카 봐주기 바쁘기 때문에.


그 시절 매일 같은 얘기를 해도 매일 재미있었던, 우리끼리만 아는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시간들도 이제는 너무 달라졌다. 나와 친구들의 상황이 달라진 만큼 우리의 대화 주제도 달라진 거다.

친구들은 서로 육아 정보를 공유하고, 시월드 썰을 풀기도 한다. 당연히 나는 경험하지 못한 주제들이다. 하지만 난 방청객이 되어 리액션을 열심히 해준다. 같이 화를 내주기도 하고, "오~"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면서.


크게 공감 되지 않는 토크에 폭풍 리액션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되고 만다. 어느새 친구들과의 만남은 에너지를 얻기보다 소진하는 쪽에 가까워진 것이다.


이제는 친구들과 여행을 가는 것도 쉽지 않다. 친한 친구들과 몇 년째 여행 계를 붓고 있는데, 언제 갈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냥 계속 곗돈만 쌓이고 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 한 명도 아니고 둘, 셋이다 보니 적어도 며칠 동안 아이들과 떨어져 여행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다. 아이들을 남편이나 시댁, 친정에서 봐주기로 하고 갈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꼭 한 명씩 갑자기 못 가는 이유가 생겨 파투가 났다.

훌쩍 여행을 떠날 수 없는 친구들도 얼마나 답답하고 속상할까 싶다.



셋째로, 그냥 나 혼자 있는 게 좋다. 오직 나를 위해서 보내는 시간이 행복하다.

위에서 말한 이유들이 쌓여 혼자 있는 게 더 좋아졌는지도 모르겠다. 뭐 어쨌든 나는 내 취향이 가득 묻어있는 이 집이라는 공간에서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아니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보내는 시간이 정말 좋다.

밖에서 이리저리 치이고, 이 꼴 저 꼴 다 보고, 소음에 가까운 말들에 갇혀 산 지 너무 오래된 후유증인 건지...

그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만의 공간에서 보내는 게 제일 마음 편해진 거다.


이게 너무 익숙해져서, 부모님이 계시는 본가에 가도 이틀만 지나면 나의 독거하우스가 있는 서울로 오고 싶어진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내가 보고 싶은 거 맘껏 보고, 듣고 싶은 거 실컷 듣고, 크게 웃기도 하고 가끔은 울어도 아무도 모르는 혼자 사는 내 집. 마치 영혼의 안식처랄까?






아빠는 이런 나를 굉장히 걱정한다.

통화를 할 때면, 어김없이 집에 있는 나에게 "하이구우, 밖에도 좀 나가고 친구들도 만나고 그러지~ 왜 그래 왜애~" 하면서 깊은 한숨을 쉰다. 아빠...나 히키코모리는 아니야...왜 그리 걱정을 해...


아빠 눈에는 아직도 한창인 내가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게 속상할 수도 있을 거다. 난 정말 집순이가 체질이라 그래. 걱정 마, 아빠!



내가 점점 더 집순이가 되어 간 이유, 찬찬히 생각하고 적어내려가다 보니 누가 보면 조금 딱하단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지금의 내 모습은 내가 살아온, 내가 선택한 삶의 조각이 쌓여 만들어진 거고 그건 되게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사는 모습은 모두 제각각이다. 내가 사는 이 모양이 누군가에게는 너무 적적할 것 같아 보여도,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 같다고 할지라도 괜찮아, 난 이게 좋다니까?!



음, 그래도 가끔은 바깥에 나가 햇볕은 좀 쫴줘야겠어. 비타민 D 결핍되면 안 돼,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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