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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토프 Sep 02. 2024

죽어가는 것과 살아가는 것

심.만.덕

심. 만. 덕.

할머니의 이름은 심만덕이다. 그녀는 휴전직후인 1954년 한때는 부유한 집의 아들이었던 공학도 아버지와 부유한 집의 외동딸이었던 미술학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 시절 같은 대학교에서 만나 인연이 된 그들은 비슷했던 집안환경덕에 자연스레 결혼 이야기가 오갔으나, 할아버지의 사업이 위기를 맞으며 집안이 급격하게 기울어지면서, 아버지는 학업마저도 이어가지 못할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비슷한 집안환경 덕분에 결혼이야기가 나왔던 만큼 한집안의 몰락은 또 다른 갈등을 만들었다. 그녀가 본 적 없는 그녀의 외조부는 하나뿐인 딸에게 절대 결혼승낙을 할 수 없다며, 그  남자를 택하려거든 평생 서로의 생사도 궁금해하지 말고 살아가자 했고, 그녀의 어머니는 처음으로 부모님을 거역하고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하는 삶을 선택했다. 그렇게 그녀는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그녀의 부모님의 어린 시절만큼 부유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명석한 두뇌덕에 이곳저곳을 다니며 쉽게 여러 가지 기술을 익혔다. 어머니는 타고난 미적감각으로 양장점에서 보조역할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데 보탬이 되었다. 만덕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고루 닮아 명석하고, 끈기 있으며, 온화했다. 무일푼으로 시작했던 가족은 둘에서 여섯이 되었고, 그녀가 중학생이 되던 해, 아버지가 양말공장을 세우면서 그녀의 집안은 더욱 풍족해지기 시작했다. 그녀에겐 남동생만 셋이 있었는데, 어느 하나 모난  없이 바르고 똑똑했다. 동네에서 4남매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렇게 별 어려움 없이 학창 시절을 보내고 그녀가 대학입학을 목전에 앞두고 있던 겨울 어느 날, 유난히도 건조하고, 바람이 시리던 그날, 뻘겋고 커다란 불이 검고 높은 연기와 함께 아버지의 양말공장을 삼켜버렸다. 순식간이었다. 아버지는 번져가는 불길을 혼자 막을 길이 없어, 쌓아놓은 원단이라도 몇 장 건져낼 생각에 창고로 향했다. 하지만 날씨 탓에 불은 아버지의 생각보다 더 빨리 번졌고, 창고의 지붕에 쉽게 불이 옮겨 붙는 바람에 아버지는 검은 연기를 마시고 쓰러졌다. 불은 양말공장과 그녀의 아버지를 잃게 만들었다. 얼마 뒤, 그녀의 어머니는 온화함 속에 있던 강인함을 잃고 쓰러져 남편을 따라갔다. 그녀에겐 여섯 식구가 살던 집과 남동생 셋만이 남았다. 부모님이 모아놓은 돈은 공장을 확장하며 매입한 기계와 원단 대금을 처리하느라 모두 사라졌다. 당장 먹고사는 문제가 그녀의 일이 되었다.

동네에 만덕의 집 말고도 알아주는 유명한 집이  하나 더 있었다. 부유하기로는 만덕의 집보다 위였지만, 비밀스러운 집이었다. 이 집에는 4대 독자가 살고 있었는데 아무도 그 남자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었다. 만덕이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온 날, 4대 독자의 어머니가 그녀를 찾아왔다.


"참으로 안 됐구나. 두 분 모두 이리 가시다니."


만덕은 그녀의 방문이 무슨 이유인지 생각해 보았지만,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저희 아버지가 댁에 빌린 돈이 있나요?"


"그런 건 아니니 걱정 말고 들으렴. 너에게 제안을 하나 하고 싶어서 왔어. 우리 집 4대 독자에 대해서 아는 게 있니?"


"아뇨..."


"그 아이가 올해 스물다섯이야. 너 내 며느리가 될 생각이 없니?"


"네?"


"장례치르고 마음이 아직 많이 힘들겠지만, 너도 나도 빨리빨리 해결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해결이라뇨?"


"남동생들이 공부를 잘하던데, 학비가 꽤 들겠어. 거기다가 한창 먹을 때잖아. 네가 내 아들과 결혼해서 아들만 낳아준다면 그 남동생들 학비 책임져줄게. 널 우습게 생각해서 그러는 게 아니야. 전부터 널 눈여겨보고 있었어. 너 같은 아이를 며느리로 두면 참 좋겠다고.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까 나도 욕심이 나더라고?"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일단 우리 집에 가자."


만덕은 그녀의 힘을 이겨낼 수 없었다. 울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던 터라 그녀에게 이끌려 그 집에 들어갔다. 만덕은 어떤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멍하니 그의 앞에 섰다.


"자고 있으니 차라리 잘 됐네. 우리 집 4대 독자. 매일 술을 마셔. 직업도 없고, 잘난 조부모에, 물려받을 돈만 있지. 그래도 어떡해 아들은 하나 낳아야지. 혹시 또 아니 네 덕에 철이라도 들지?"


만덕은 냉철해지려고 애썼다.

'정신 차리자. 난 아직 기술도 능력도 없어. 아들. 아들 하나만 낳으면 되는 거야. 그럼 동생들이 나처럼 맘고생 안 하고 편히 살 수 있어... 그런데......'


"술 안 마신 날.. 한번 만나보고 결정해도 될까요?"


"내일 아침에라도 다시 오겠니? 나도 그때 아니고서는 맨 정신인 아들 보기 힘들거든. 잘 생각해 봐.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거야."


만덕은 동이 트기 전 푸른 새벽에 접어들었을 무렵 잠시 눈을 감았다. 밤새 손해보지 않는 장사인지를 떠나 어떻게 동생들이 자신의 희생을 평생 모르고 살아갈 수 있을지 생각했다. 커튼사이로 햇빛이 그녀를 깨웠고, 그녀는 지금의 시련에서 벗어나려는 듯 한참을 씻더니 거울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대학교 입학식에 입으려던 옷을 꺼내 입고, 아버지가 사준 예쁜 구두도 꺼내 신었다. 평생 간직하려던 옷과 구두가 이렇게 바로 쓰임이 있을 줄은 그녀도 상상하지 못했다. 동생들에게 간단한 메모를 해두고 처음 신는 구두가 어색해 아주 천천히 집을 나섰다. 또각또각 소리와 쿵쿵 거리는 심장소리가 그녀의 발걸음과 뒤엉켜 아무 생각도 들지 않게 했다.


"계산기는 잘 두들겨 봤나 보네? 그래~ 잘 생각했어~ 방금 일어나서 씻는 모양이더구나. 응접실에서 잠시만 기다려줄래?"


4대 독자의 어머니는 신이 난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2층으로 올라갔다. 잠시 후 그녀의 부름에 만덕은 아들이 있는 2층으로 불려 갔다.


" 1층보단 여기가 낫지 않을까 싶어서~ 둘이 할 얘기도 있을 거고? 내가 어지간한 정보는 얘기해 놨어. 그럼 얘기 잘하고 와~"


너무 긴장한 탓일까 만덕은 졸음이 몰려왔다. 하품이 나오려던 찰나 대충 말린 머리를 비벼대며 4대 독자가 그녀 앞에 섰다.


"앉아."


아무런 대답 없이 앉는 만덕을 빤히 보던 그는 재미없다는 듯 말을 건넨다.


"반말하는 거 거슬려? 나랑 다섯 살 차이 나는 거 같던데?"


"아뇨, 괜찮아요."


"그래서 지금 심정이 어떤데?"


"어떤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나랑 똑같네 나도 잘 모르겠거든. 돈으로 맺는 인연이 옳은 건 아니라는 걸 너도 분명히 알 거고, 그런데 결정은 내려야겠고, 나는 하필 돈만 많은 부잣집에 능력 없는 4대 독자로 태어나서 생각에도 없는 아들을 낳아야 하고, 살아있는 게 지옥인데 애까지 어떻게 낳으라는 거야! 전부 다 정해져 있어 난 거기에 맞춰서 살면 되는 편한 인생이지. 근데 난 그게 싫어. 그래서 이렇게 술이나 처먹으면서 죽기만 바라고 있는 거라고."


처절했다. 만덕이 본 그의 모습은 처절했다. 분노보다 외로움과 슬픔이 보였고,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죽어가는 인생을 택한 그의 얼굴과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얼굴이 어딘가 닮아 보였다.


"제가 필요한가요?"


"그건 나에게 의미 없는 질문이야."


"그럼, 정해져 있는 인생에 한 사람이 아니 두 사람이 같이 그 길을 가준다면 그건 어떨 것 같아요?"


"너 미쳤어?"


"미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저는 제가 필요 없어요. 제 생각도. 그 무엇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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