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Banana Project, 2016

'손'으로, '머리'로, 그리고 '마음'으로

by tautFLUID

네덜란드 디자인 아카데미 아인트호벤(Design Academy Eindhoven)에서의 배움은 크게 4단계로 나뉠 수 있었다. 이전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나’를 뒤흔들어 불순물을 걸러내고 자기의 모습을 마주하게 하는 1학년, 그리고 자기의 색깔을 온전히 끄집어내고 그것을 전달하는 법을 배우는 2학년, 그리고 외부에 나가 세상을 보게 만드는 3학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집약시켜 온전한 나만의 이야기를 준비하는 마지막 4학년.


오늘 소개할 작업은 2학년 시절에 했던 나의 세 가지 작업 중 첫 번째 ‘Banana Project, 2016’이다.


그 시절 작업이 의미 있는 이유는 분명하다. 디자인이라는 도구를 통해 세상을 해석하는 나만의 본질적인 방식을, 처음으로 키를 잡고 원초적으로 탐구했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수업은 총 세 학기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학기마다 주어지는 하나의 주제를 각자의 방식대로 자유롭게 이끌어가는 구조였다.



01/ 자유라는 이름의 용기


‘자유’, 웬만한 상황에서 자유가 주어진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제약 없이 온전히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주기적으로 '미션과 평가가 따르는 자유’는 역설적으로 무게감, 책임감을 스스로 짊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우리에게 2학년 첫 학기 수업에 던져진 주제는 ‘자연섬유’였다. 주제에 대한 설명과 함께 따라온 것은 오로지 몇 가지의 자연섬유 리스트뿐이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상점에 가거나, 슈퍼마켓을 방문하거나, 아니면 온라인으로 쉽게 구매할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난 ‘젊은이’들에게 ‘자연섬유’라는 것은 굉장히 거리가 먼 생소한 것이었다. 우리는 완성된 재화나 식품뿐만 아니라 ‘재료’도 ‘상품’으로 마주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 섬유, 버섯, 코코넛 섬유, 바나나 섬유, 파인애플 섬유, 미역 등등의 리스트를 던져주고, 알아서 선택하게 하고, 다음 주까지 ‘위빙(Weaving)’ 테크닉을 사용해 5개의 머테리얼 샘플을 가져오라고 했다.


단지 ‘재료 선택 및 확보’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이미 프랑스 학교에서 텍스타일을 전공했던 친구들과 달리, 나는 이전에 텍스타일을 다루는 테크닉을 전문적으로 배워 본 적이 없었다.


우리가 건네받은 것은 ‘자유’였지만 오히려 ‘채찍’처럼 느껴지는 이유에 대해서 분석할 여유도 없이 재료를 구하기 시작했다.


자연과 멀어진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가 자연의 소재를 구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2016년 당시에는 지금보다 디자인계에서 자연섬유를 사용하는 일이 훨씬 더 드물었기 때문에 다양한 샘플을 만들 양을 네덜란드 안에서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특히 내가 고른 ‘바나나 섬유’는 더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한 학기 동안 연구해야 하는 ‘재료’인 만큼 뭔가 구하기 쉬운 정도를 머테리얼 선택 기준으로 두고 싶지는 않았다.


때때로 나는 이성보다는 감성을 잣대로 무언가를 선택하곤 한다. 모든 것이 생소하고 핸디캡인 상황에서 내가 확실히 쥐고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즐기는 마음’이었고, 무언가를 즐기려면 일단 ‘정’이 가는 소재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했다.



02/ 익숙하지만, 생소한


‘바나나’만큼 친숙한 과일도 없지만, ‘바나나 섬유’에 대해서는 그동안 들어본 적도 생각한 적도 없었다.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먼저 필요했다. 단순히 무언가를 만들기 위한 재료, 즉 ‘수단’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궤적을 따라서 인간과 바나나 그리고 바나나 섬유가 어떤 동행을 했는지를 알아야 했다.


과거에는 어떻게 사용되었으며, 어떤 식으로 생산이 되고 공급이 되었는지부터 리서치하기 시작했다. 처음 애완견을 만나기 전에, 애완견과 공생하는 방법을 공부하는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거미줄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듯이, ‘바나나 섬유’에서 시작된 리서치는 거꾸로 올라가 ‘바나나 식물’부터 ‘바나나 산업의 이면’까지 확장되었다.


수많은 질문이 가지를 뻗어나갔다. ‘왜 바나나 섬유는 소재로서 가치가 있을까?, ‘바나나 생산량이 그렇게 많을 수 있는 이유는 뭘까?’, ‘바나나 산업이 가지는 장단점은 무엇일까?’ 등등, 그 모든 것들을 견인해 주는 것은 ‘왜?’라는 질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재료’를 생각하는 나의 관점은 확장될 수밖에 없었다. 단지 화방에 가서 재료를 구매하고 그것을 가지고 무언가를 창작하는 것이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재료가 어떤 식으로 생산되고, 공급되고, 소비가 되어 내 앞에 놓이게 되었는지 추적하는 동안 ‘바나나 섬유’의 여정이 머릿속에 그려졌고, 그 지점에서 바나나 섬유를 통해 찾아야 할 가능성과 내가 이야기해야 할 지점을 가늠할 수 있었다.


심지어 바나나 식물 그 자체도 하나 구매했다. 단기간에 무언가를 끌어내려면 생소한 만큼 가까워지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03/ 바나나 섬유 파헤치기


‘바나나 섬유’는 처음부터 반전이었다. 우선, 바나나 나무는 내부가 ‘잎집(Leaf sheath)’이 겹겹이 쌓여 있는 구조로 된 ‘거대한 허브(초본 식물)’였다. 즉, 나무가 아니었다. 그리고 ‘바나나 섬유’는 바로 그 ‘가줄기(Pseudostem)’에서 추출된다.


그 지점에서 바나나 섬유가 가지는 가치가 드러나는데, 자라는 데 수십 년이 걸리는 나무에 비해 바나나 식물은 풀이기 때문에 1년 안에 수 미터까지 자란다. 또한, 바나나 열매를 수확하고 나서 줄기를 잘라줘야 다음 성장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만큼 폐기되는 줄기의 양도 많다. 그리고 나무가 아니라 잎집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기계적인 압착만으로도 섬유를 쉽게 분리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바나나 섬유의 유통 과정과 그 이면의 이야기에 대해 알아가는 동안, 바나나 섬유가 도착했다.


처음 마주한 모습은 섬유라기보다는 쫀드기 같은 생김새에 살짝 단단하고 거친 느낌이었다. 알고 보니 그것은 갓 추출하여 건조된 ‘미가공 원사(Raw Fiber)’였고, 섬유 자체가 가진 리그닌과 펙틴 성분 때문에 짚이나 나무껍질처럼 딱딱하고 뻣뻣했다.


그래서 섬유처럼 사용하기 위해서는 두드리고(Beating), 삶고(Degumming), 유연제 처리(Softening)를 해야 했다.


일반적인 텍스타일 작업이었으면, 그저 알맞은 색상과 텍스쳐를 확인 후 바로 구매해서 작업을 하면 되겠지만, 자연 섬유를 연구하는 것은 재료를 직접 손으로 다뤄가며 특성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했다.


전통적인 방식인 위빙(Weaving), 니팅(Knitting), 펠팅(Felting)부터, 각자가 자유롭게 새로움을 더하는 방식으로 매주 5개씩 머테리얼 샘플들을 가져갔고, 서로의 결과물을 공유하면서 점점 더 시야를 넓혀가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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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점은, 같은 위빙이어도 과거에 텍스타일 테크닉을 배운 친구와 아닌 경우가 달랐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을 서로 비교하는 것 자체가 서로에게 큰 인풋이 되었다. 나 같은 경우는 자연스럽게 원시적(?)인 방법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학교 워크숍에서 주운 나무판에 일정 간격으로 못을 박아 만든 나만의 위빙 도구를 사용했다. 결과물은 전문적인 위빙 도구를 사용한 것에 비해서 러프했지만, 투박한 날것의 매력이 있었다. 때때로 제약은 새로운 가능성으로 치환되곤 한다.


나의 집 안은 계속되는 빗질로 강아지나 고양이를 키우는 집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변해갔다.


즐기는 마음은 더 거침없는 테스트로 이어졌고, 나는 단지 바나나 섬유만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바나나 줄기와 바나나 껍질까지 활용하기 시작했다. 바나나 섬유도 생소한 마당에 굳이 다른 것들까지 다뤄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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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옥수수 전분과 식초, 글리세린을 이용해 만드는 바이오 플라스틱 레시피를 활용해 딱딱한 버전의 샘플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직접 먹고 남은 바나나의 껍질 안쪽 면을 긁어내고 껍질을 말려서 그것을 섬유처럼 꿰매어 활용해 보기도 했다. 그리고 바나나 줄기의 잎을 우려서 얻은 물로 바나나 섬유를 염색해 보기도 하고, 녹인 왁스에 말린 바나나 잎사귀를 섞어 굳혀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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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잎사귀부터 줄기까지, 의자로 재탄생하다


몇 달간을 마주하면서 알게 된 바나나 섬유의 특징은, 열심히 빗질하면 할수록 실크처럼 특유의 광택이 살아난다는 점이었고, 가볍지만 반대로 인장 강도가 높은 편이라 내구성이 뛰어나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실크 같은 섬유로서의 특징을 살리는 한편, 바나나 잎사귀와 잎에서 추출할 수 있는 초록빛을 바이오 레진과 함께 사용하여 구조를 만드는 ‘의자 시리즈’를 디자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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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의 형태는 산업적인 가공보다는 자연적이고 원초적인 소재의 특성을 전달하는 데 집중했다. 즉흥적인 콜라주로 형태를 구상하고, 이를 스케일 모델로 구현하는 방향을 택했다. 은은한 광택이 도는 섬유의 결들과 잎사귀에서 배어 나온 날것의 초록빛이 투명한 레진 속에서 굳어지며, 정글의 유기적 생명력이 뿜어내는 거칠고도 특별한 질감을 담아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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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자연적인 소재인 바나나 섬유가 가지는 잠재력, 그리고 하나의 원료에서 부드러운 섬유와 단단한 복합재를 동시에 추출해 온전한 재순환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05/ 줄기 너머의 가치


바나나 섬유는 현대에 갑자기 발굴된 ‘신소재’는 아니다. 13세기 일본 오키나와 왕실의 여름 의복이었던 ‘파초포(Bashofu)’나, 19세기 필리핀에서 튼튼한 선박용 로프로 쓰였던 ‘아바카(Abaca)’처럼 오래전부터 국가적 정체성이 담긴 산업으로 활용되어 왔다.


하지만 이들은 섬유 추출에 특화된, 열매를 먹을 수 없거나 아주 작은 품종들이었다. 여기서 내가 주목한 점은, 과연 오늘날 우리가 식용으로 생산하는 ‘바나나’에서 추출할 수 있는 섬유는 제대로 활용되고 있는지였다.


오늘날의 바나나 산업은 ‘단일 경작의 위험’을 가지고 있을 만큼, 현재 상업적으로 유통되는 바나나 대부분은 ‘캐번디시(Cavendish)’품종이다. 유전적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점은 파나마병 같은 전염병에 매우 취약하게 만들며, 이를 방지하기 위해 청과 기업들은 과도한 농약을 사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거 대형 청과 기업 중심의 착취 구조를 비판하고, 최근에는 생산자의 권리를 보호하고 수익을 공정하게 나누는 ‘공정무역’ 바나나와 그 부산물을 활용한 2차 산업(섬유, 종이 등)에 대한 투자가 늘고 있다고 한다.


그 지점에서, 대중들에게 이런 ‘바나나 산업의 이면’과 함께 ‘바나나 섬유의 가능성’을 전달하는 것은 긍정적인 순환에 힘을 더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전통적으로 이미 다뤄졌던 어떤 것’을 바라볼 때 그것이 이미 한계를 마주한 무언가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오히려 과거의 배경이나 선입견이 없기에, 지금 이 시대의 시선으로만 끄집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 분명히 있다. 누군가는 과학자로, 누군가는 사회 운동가로, 또 누군가는 디자이너로 이 새로운 움직임에 힘을 보탤 때 생기는 시너지만큼 가치 있는 게 또 있을까?


산업 분야에서의 디자이너는 ‘효율성’과 ‘효용성’을 먼저 고려해야 하는 부분이 있겠지만, 더 확장된 개념의 디자이너는 ‘스토리텔러의 역할’을 할 수도 있고 ‘가능성을 확장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대중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을, 디자인을 도구로 재조명하고, 미적인 언어로 엮어 전달하는 것도 디자이너의 역할이다.


그렇게 나는 ‘손으로’ 이해하고, ‘머리로’ 탐구하며, ‘마음을 담아’ 전달하는 방법을 알아가고 있었다.



[tautFLUID Soundscape] : David Bowie - Changes

‘바나나 섬유에 둘러싸여 열심히 빗질하고, 엮고, 두드리고, 꿰매던 시간. 그것은 정체된 것에 가능성을 불어넣고자 했던 나의 치기 어린 용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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