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보다: 여름 2022』강가/Ganga
어느 늦가을, J는 휴가 나온 친구와 건대의 한 술집을 갔었다. 사회적인 체면상의 그들은 수도권 대학을 다니고 있는 대학생이자 복무 중인 군인이었지만 그 자리에서는 익명의 힘을 빌려 "시내 구경을 처음 나와 서울과는 그 어떤 연고도 없는 스무살"이었다. 합석했던 여자 둘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나는 그저 김해김씨로만 불렸고, 다른 하나는 가명도 기억나지 않는, 그래서 접점이 더더욱 없는 어느 누군가였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그 자리에 합승한 넷은 익명성과 취기를 빌려 무책임한 분위기에 몸을 맡겼다. 연고지가 아닌 그곳에 나와 있는 J는 책임감을 가질 일도, 수치심을 느낄 일도 없었다. 책임 없는 안락만 즐기면 될 뿐이었다. 땅에도, 물에도 속하지 않은 경계선에 놓여 주변의 물길에 따라 흘러가는 강가처럼.
무언가를 나누는 일은 굉장히 어렵다. 배려를 나누고 우정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는 인간의 관계에서 상처 받아온 사람은 그 책임을 또 짊어지기가 부담스러워 도피하는 방식을 택하기도 한다. 연고가 없는 타지에 남자를 '사러' 온,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강가'처럼. 강가라는 정체성은 그저 작중에 등장하는 '나'의 페르소나에 불과하다. '나'라는 사회적 인물은, 여성으로서 세상과 연결되기 위해 겪을 고통을 피해 안전한 방법으로 '강가'로서 남자를 사고자 한다. 사려고 한다는 뉘앙스가 거북하게 느껴질 법도 하다. 성별이 다른 누군가를 '산다는' 행위 자체를 직관적으로 생각하면 성매매 같이 부정적인 행위가 먼저 떠오르기 마련이다. 마음을 주고받는다는 추상적인 발상처럼 무언가를 '나누는' 행위는 어렵고, 물건을 사고 영수증을 받는 실질적인 거래처럼 '사는' 행위는 대체로 쉽고 매끄럽게 이어진다. 사회적인 질타를 받기 쉽다는 점이 그 행위를 실천하기 어렵게 하는 걸림돌이일 뿐.
그러니 '나'라는 사회적 인물의 정체성을 아무도 모르는,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강가'라는 가면(persona)을 쓰고 돌아다니는게 가능한 이국의 장소가 얼마나 매혹적인가? 강가가 겪는 일들은 '내가' 겪는 일들이 아니기에, 그가 하는 행위에 책임이라는 사명감 없이 페르소나의 대리인으로서 오로지 쾌락만을 즐길 수도 있다. 강가와 조우한 인연에 대해서도 달리 책임질 필요도 없게 느껴진다. 반대로 강가 또한 '나'의 품격에 제한되지 않고 마음껏 원하는 걸 누리는게 가능하다. 그렇다면, 강가에 대한 타인의 호의를 '내가' 아무런 대가 없이 받아들일 수도 있는가? 그 인연을 형성한게 '강가'였음에도 '나'가 그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그리고, '강가'라는 거짓된 인물에 대한 반응을 진실되게 보답해줄 수 있는지.
그는 떠나기 직전에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이름이 뭐죠? 나는 어떤 이름도 대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이 도시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자 결심했는데. 막상 누군가 이름을 묻자 무엇도 답할 수 없구나. 상대방의 이름을 묻는 일 역시 불가능했다. 질문하는 일도, 답하는 일도, 두려울 뿐이다. 나는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름 모를 남자는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유 쎄이브 마이 라이프. 당신이 내 목숨을 구했어요. 유 쎄이브 마이 라이프. 당신이 내 목숨을 구한 거예요.나는 그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하고, 번역한다. 몸의 떨림이 멈추자 눈앞의 모든 색이 선명해진다. 오래 기다린 죄책감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소설 보다: 여름 2022』강가/Ganga | 함윤이
J는 그러지 못했다. 본인이 아닌 타인이 되는 일이 익숙치 않았다. 감정 없이 감각만 나누면 되는 그런 안전한 소통이 낯설었던 J와 함께 바람을 쐬러 나온 가명인이 느닷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이기적인 양심의 가책 때문에 끝까지 타인인 척할 수 없었던 J가 모든 거짓말을 털어놓았고, 가볍게 위안을 느끼고 싶었던 가명인은 배신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익명의 힘을 빌려 맺었던 인연이 수포로 돌아갔고, J는 택시를 타고 돌아갈 여자 둘을 배웅해준 다음에 길거리에 놓인 주차방지 말뚝을 끌어안은 채 본인을 병신이라고 나무라는 친구를 들어올려 함께 집으로 향했다.
다음 날 J는 연락을 주고받은 가명인의 연락처를 핸드폰에서 흔적 없이 지워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