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큰 딸, 자기 방 책상 벽에 이렇게 붙여 놓았다.
나도 헤르미온느처럼!!
내 딸은 해리포터 덕후다. 헤르미온느가 내 딸의 아이콘이다. 작은 딸은 벌써 몇 년 전부터 해리포터 시리즈에 푹 빠져 있었는데 큰 딸이 뒤늦게 참전한 모양새다. 그런데 해리포터 시리즈에 대한 큰 딸의 애정이 보통이 아니다. 마법지팡이를 무료로 나눔 받는가 하면 미국이나 일본 등지에 있는 해리포터 센터에 가 보겠단다. 야심만만하다.
이야기는 인류의 오랜 전통이다. 단순히 전통 정도가 아니라 인류 문명의 근간에 이야기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가 쌓은 업적이란 이야기란 가상의 공간에 지은 집과 같다. 영국의 스톤헨지처럼 수천 년 된 유물은 종교적 믿음이나 이데올로기적 힘이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게 학계의 공통된 견해다. 인간은 문자가 없던 시절부터 이미 이야기를 만들어내거나 스스로 만든 이야기를 믿으며 지내왔고 신화와 종교를 만들어냈으며 그 바탕 위에서 건축, 예술, 정치 시스템 등을 창조해 왔다.
오늘날, 이야기의 힘은 여전히 우리를 지배한다. 법은 명문화된 이야기의 집약본이고 정치는 이야기를 통해 현재를 통제하고 미래를 만들어가는 장치다. 이야기는 여전히 자본주의적으로도 매력적이다. 극장과 서점에는 새로 쓰여진 이야기로 가득하다.
인간은 이야기로 세상을 인식한다. 자기 자신의 존재도 서사의 한 인물쯤으로 바라보는 게 일반적이다. 우린 어린 시절부터 숱한 이야기를 들어왔고, 오늘 이 순간에도 새 이야기에 목이 마르다.
그 이야기의 힘이 이제 내 큰 딸도 점령해 버렸다.
호그와트 학교가 있다면 내가 정말 들어갈 수 있을까?
호그와트에서 공부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마법사가 된다면 난 뭘 해야 하지?
큰 딸은 종종 내게 엉뚱한 질문을 늘어놓는다. 나, 이런 질문에 되도록 진지하게 대답해 주는 편이다. 호그와트가 있다면 아빠부터 입학하고 싶은 걸? 너라면, 호그와트의 훌륭한 일원이 될 것 같아, 식으로 말이다.
며칠 전 큰 딸애가 무료 나눔으로 받은 마법 지팡이를 잃어버려 큰 소동이 일어났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가방에 넣었는데 집에 와서 보니 없다는 것이다. 큰 딸은 자기 동생을 데리고 그 야밤에 집에서 학교까지 가는 길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고 나서 돌아와선 없네, 하고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아빠, 지팡이 새로 사 주면 안 돼?
왜, 안 되겠니, 당연히 사 줘야지.
나는 큰 딸애의 열렬한 지지자다. 딸애가 필요하다면, 사 주고 싶은 게 내 마음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다음 날, 잃어버렸다던 지팡이는 학교 교실에서 발견됐단다. 나, 휴 하고 안심했다. 쓸 데 없는 데 돈을 낭비하지 않아도 돼 다행이군, 하고 생각했다.
큰 딸애는 이 다음에 자신도 J. K. 롤링처럼 거대한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작가가 되고 싶단다. 나는 그 꿈에 두 손 모아 응원을 보냈다. 넌 할 수 있을 거야, 암 우리 활리라면 해내고 말겠지. 딸애는 어깨를 으슥하며 자신감을 가졌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날 수도 있고 안 일어날 수도 있겟으나, 이야기의 역사에 기꺼이 참전해 보고 싶다는 딸애의 바람이 나는 사뭇 대견스러웠다. 딸애는 요즘 해리포터 때문에 무척 즐거운 나날을 보낸다. 주말이면 봤던 장면을 또 돌려 보고 호그와트 수업에 대해 분석하고, 이야기의 구성을 해체해 나름대로 재구성하는 데 시간을 보낸다.
보통 요즘 중학생들은 수업과 학원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이야기와 분리된 채 살아가는데 내 아이는 전통의 방식을 따라 적당히 공부하고 적당히 세계에 관심을 가지니 기쁘다. 나는 딸애가 시기에 맞게 추억과 기억을 차곡차곡 쌓아나가길 원한다. 공부? 그거 적절히 해야 한다. 구겨넣는다고 될 일이 아니다. 학습의 적절한 양과 질을 결정해 줄 책임은 부모와 선생에게 있다. 그런데 요즘 부모와 선생들, 이 책임을 외면한다. 그저 많이, 더 많이, 더더 많이를 외칠 뿐이다. 나는 이런 학습량에 대한 예찬에 단호히 반대한다. 그거, 넘치면 병 된다.
학습으로 생긴 피로와 스트레스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이야기다. 이야기가 내 아이의 건강한 삶과 풍요로운 체험을 담당해 줄 것이다. 해리 포터 때문에 신난 건 내 큰 딸이지만 그걸 보고 덩달아 나 역시 신이 난다. 이야기여, 내 딸을 부디 잘 성장시켜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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